들은 꽃을 자라게 할 뿐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들은 많은 꽃을 피운다.
그 언덕에 크고 작은 많은 꽃들을 피게 한다.
냉이꽃, 꽃다지, 제비꽃, 할미꽃, 노랑민들레가 다투어 피어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 꽃들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계절이 바뀌고 새로운 꽃들이 다시 피고 지는 동안 들은 그 꽃들을
마음껏 자라게 할 뿐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꽃들로 가득 차 있다.
강물은 흘러오는 만큼 흘려보낸다. 그래서 늘 새롭고 신선할 수 있다.
제 것으로 가두어두려는 욕심이 앞서면 물은 썩게 된다.
강물은 제 속에 많은 물고기들이 모여 살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게 할 뿐 소유하지 않는다. 산도 마찬가지다.
그 그늘로 찾아와 둥지를 틀고 깃들어 살게 할 뿐 소유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은 늘 풍요롭다.
산짐승들이 모여들고 온갖 나무들이 거기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그것들이 모여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산이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새들이 마음껏 날개치게 하는 하늘은 더욱 그렇다.
수많은 철새들의 길이 되어주고 자유로운 삶터가 되어줄 뿐
단 한 마리도 제 것으로 묶어두지 않는다.
새들의 발자국 하나 훔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은 더욱 넓고 푸르다.
생이불유(生而不有).
<노자>에서는 이런 모습을 "천지와 자연은 만물을 활동하게 하고도
그 노고를 사양하지 않으며,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하여
'생이불유'라 한다.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들지만 그 안을 비워두기 때문에
그릇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릇의 안이 진흙으로 꽉 차 있다면
그 그릇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릇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진흙덩어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릇이 커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은 큰 그릇이 될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그것은 그만큼 도량이 크고 마음이 넓다는 뜻인데,
다른 사람을 품어 안고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으려면 마음이
비어 있어야 한다.
집을 짓고 방을 만들 때 그 내부를 비워둠으로 해서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비워둠으로 해서 비로소 가득 차게 할 수 있는 이 진리,
이 무한한 크기....
사람의 마음도 삶도 비울 줄 알 때 진정으로 크게 채워지는 것을 만날 수 있다.
봄에 끄적인 글. "나를 찾아서"
한가해서 밥값이나 하려고 몇자 끄적여 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저는 저 자신을 확연이 모름니다.
아마,나 자신을 알려면 '우주삼나만상'을 모두 꽤뚫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동(울림)으로 내면의 영혼은 느낄 수 있습니다.
성명쌍수란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닦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닦을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각자 분들이 말씀하시길..
우리들의 참 본성의 근원은 모두다 부처라 했습니다.
다만, 흐르다 보니 집착하게 되었고
그로인해 퇴색되어 많은 비실재의 환상을 창출하게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참마음이란 무얼까요.
우리들은 세세생생 쌓아온 까르마의 '습'으로 인하여
여러므로 굴절되어 있기에 어둠이라는 환상을 창출한 듯 싶네요.
그러하기에 진정한 자신의 참마음(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하여 그 찌꺼기들을 타파하는 것이 마음을 닦는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대부분 막연하게 마을공부를 하므로 헛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듯 사려됩니다.
진정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되는지
한결 확연해 지리라 확신합니다.
고로, 미약하지만 저가 체험하고 알아차린 쉬운 방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생각이 많은 터라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려고 기존의 인간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렇다고 인연을 끊으라는 소리는 절때로 아니야요.^^;
저의 상황으로선 그렇게 하는 것이 저로서는 최선이라 생각되었기에 그랬을 뿐입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생활하며 부정적인 상념에 끄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긍정적인 생각, 아름다운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또한 부정적인 성향으로 인하여 부조리를 인지하여도 나와 남을 탓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불성(혼~그리스도의식~불성~하느님~진아~진여~아트만~브라만~등등)이
심장에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하위자아의 의식+마음으로 스스로를 사랑했지요.^^
자신의 모난점까지 절절하게 닭이 알을 품드시 스스로를 사랑하시와요.(저가 그랬걸랑유.^^;)
그렇게 몇칠을 지내며 술한잔 하는뎅 - -;
몸을 너무 혹사하는 것 같아 저 자신이 안탁까워서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슴이 찡~ 했더랬습니다.
바로 그때 가슴에서 향긋한 내음을 풍기며 강하게 진동(울림)을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오라! 이러한 존재가 영혼이였군아..히야~ ^^
아스트랄계(저차원계"광물,식물,동물,하위영계")+맨탈계(상위차원계)의 신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느껴왔지만
직관적인 느낌으로 내면의 순수한 '영혼'이란 것을 알겠더라구요.헤헤
참고로, 인간은 소우주라 단순히 끄적이자면
아스트랄계+멘탈계+직관계(우주의 모든 지식의 창고- -;)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때의 저의 상황은 시끄러운 시장통과 비스므리 했고
정신적인 까르마로 인하여 집중도 잘 돼지 않았으며 맨날꼰날 술퍼먹으면서도 알아차렸으니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고행을 하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순수한 영혼의 파장은 사랑과 자비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와 상극을 이루는 쪽으로 수행하니 통하지 못한듯 싶네요.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살면서 사랑이든,자비든,반성이든, 진심이 되었을 때
알게모르게'영'은 깨어나면서 손짖을 하는것 같습니다.
다만,무지로 인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죠.
해탈이라는 것도 흘러오면서 퇴색되어진 환상을 걷어 치우고
맑고 밝은 본연의 마음으로 '원시반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사려됩니다.
불교에서는 흔히들 적멸(영혼까지타파함)을 말하는데
영,만 해탈하는 방편과 몸과 영,이 해탈하는 법이 있다고들 합니다.
다만, 나라고 착각하는 유한한 하위자아가 분별하고 분리할 따름이지
근원적으론 처음부터 분리란 존재하지 않음이지요.
저의 얕은 소견으론,영혼까지 타파하는 적멸은
지금으로선 애메 묘~ 하고 아주 조심스러운 문제라 사려됨니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어떠한 상황에서도 까르마에 끄달리지 않는 수준?)목표지만
대승의 차원에서는 '아라한'은 진정한 공부를 할수있는 자겪을 가추었을 뿐 '불'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소승이 작고 대승이 크다는 착각에 빠저서는 아니되겠지요.
모든 법들이 하나로 꽤어저 있으니..
올바른 법이라면'선법'이든 '불법'이든 무엇이든 궁극적으로 통하는 길이라 사려됩니다.
이제는 나를 살리는데 힘쓰쟝~ 앗싸~
봄이라서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