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길지만 한번 읽어보시면 후회 안 하실 거예요.ㅎㅎㅎ

                                                          제목  한여름밤의 꿈


                                                                                                          /곽노순 목사

온 우주를 안을 수 있는 꿈의 신비...
빵 점짜리도 백 점짜리 꿈을 꿀 수 있다

어젯밤엔 무슨 꿈을 꿨습니까? 풀밭 위를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면서, 꿈 속에서도 그것이 제발 꿈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닌지요. 중력의 무거움이 지배하는 세계로 다시 떨어지고 만 것을 못내 아쉬워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좋은 꿈을 꾼 것이겠지요. 하지만 아마도 더 좋은 꿈은, 통통한 돼지를 끌어안고 똥통에 빠졌다는 식의 꿈이 아닐까요? (잠시 웃음 바다.) 그런 꿈을 꾸고 나서는, 오늘은 과연 얼마만큼 재수가 좋을지, 기대하는 마음이 클 것입니다.

누구나 꿈을 꿉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교육을 많이 받은 자나 적게 받은 자나, 꿈을 꾸는 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걷고 뛰고 무어라고 열심히들 지껄이다가 밤만 되면 사지를 눕히고 잠을 자는데, 그것도 일생의 삼분의 일을, 60년이라면 자그마치 20년 동안을 잠을 자면서 보냅니다. 그것만도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잠을 자면서 누구나 꿈을 꾼단 말입니다. 태양이 지구의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밤만 되면 일제히 서로 다른 영화를 관람한다는 이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만 년 전부터 인간이 꾸어 온 꿈을 레이저를 이용, 홀로그래피로 상영한다면 참으로 기막힌 그림이 될 것입니다.

잠이라는 것이 생존의 조건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근래에는 꿈 역시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 입증된 바 있습니다. 뱃속의 태아도 무슨 경험이 있는지 15시간을 꿈꾸고, 막 태어난 아이는 8시간을, 두 살 무렵이 되면 3시간을, 보통의 인간은 2시간을 꿈꾼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꿈을 꿀 때는 안구가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이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흔들어 깨웠더니 거의 정신병자 수준에 도달했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꿈꾸기를 말렸더니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환상을 보고, 며칠이고 이를 보충해야만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더란 말입니다. 이를 역이용해서 고문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잠과 꿈이라는 것이 생존에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꿈 없이 잘 잤다고 말하곤 하지만, 이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리 고고한 척, 성자인 척하더라도 꿈 속에서는, 대낮의 고상함에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어지럽고 사나운 꿈을 꾼다고 보는 것이 대체로 맞는 견해일 것입니다.

상을 당해서 대낮에는 온통 슬픔 속에서 헤맸던 이들이, 차마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지만 밤에는 낄낄대며 웃는 꿈을 많이 꾼다고 합니다. 대낮의 삶에 억지 웃음이 많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 밤이면 실컷 울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균형을 맞춥니다.
이렇게 균형 맞추기를 해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그 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누가 꿈을 꾸게 해서 울고 웃게 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꿈을 잘 꿈으로써 한 나라의 재상이 되기도 하고, 왕비가 되기도 한다니, 꿈꾸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지 궁금증이 더해집니다.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 보희는, 산 꼭대기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서라벌 전체가 오줌에 잠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보희가 동생인 문희에게 그 꿈 이야기를 했더니 문희가 비단치마 한 벌을 언니에게 주며 그 꿈을 팔라고 간청하여, 보희는 웃으면서 “그래, 너한테 팔았어”라고 말했지요. 그 후 보희가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될 뻔하다가 동생인 문희가 왕비가 되었다고 하니, 꿈이라는 것을 과연 사고 팔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꿈꾸는 주체와 객체와 또 다른 손님 사이에 무엇이 거래된 것인지, 그 메커니즘이 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꿈, 그 영원한 미지수

흔히들 꿈꾸는 주체를 아스트랄체가 하는 짓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처럼 애매한 것도 없습니다. 아스트랄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면, 수수께끼가 다 풀리던가요? 그건 마치 미지수로 미지수를 풀려고 시도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돌려도 자물쇠는 열리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이 사상누각 같은 우리 교육의 현실을 빗대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산수 시간에 1미터는 100센티, 1센티는 10밀리라고 죽어라 외웠는데, 목사님이 다니시던 산골 초등학교에서는 자를 본 적이 없는 학생이 거의 대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웃음)

그것처럼, 꿈이라는 미지수를 아스트랄이라는 미지수에 대입시켜 보았자 결과는 뻔합니다. 죽어서 누구나 가는 곳을 아스트랄 계라고 해보았자, 문제만 자꾸 번져 나갈 뿐 분명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감정체다, 정신체다, 원인체다, 등등으로 이름을 붙여놓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이름 붙이기’가 본능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그래서 ‘미확인비행물체’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는 UFO라고 하면 무엇을 알아내기라도 한 양 “아하, 그것!”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름이란 그저 거품일 뿐, 실체가 아닙니다.

제자 한 사람이 “아무개 도인은 9층천에 갔다왔다는데,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라즈니쉬는 코웃음을 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난 42층천에 갔다왔다!!” (웃음)

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만, 3층천이든 9층천이든 42층천이든 아무런 정보도 주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과 무슨 상관 관계가 있습니까? 고개를 잔뜩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자 고개만 아플 뿐, 오늘의 내 존재 양태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자꾸 겉돌기만 해서는 말만 풍성할 뿐입니다. 의식이니 초의식이니 잠재의식이니 표면의식이니 나누고 분류해 보았자, 분명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당면한 내 존재를, 지금 여기를 응시해야지, 잔뜩 딴전 피우면서 내 문제를 해결이라도 한 것처럼 거짓 위안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꿈이라는 미지수를 아스트랄이라는 미지수에 대입시켜
보았자 결과는 뻔합니다. 문제만 자꾸 번져 나갈 뿐
분명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마다 상영되는 영화

동양의 전통에서는 꿈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습니다. 서양에서도 꿈이라는 표제가 정면으로 떠오른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꿈은 하늘과의 대화를 전공으로 삼는 무당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을 프로이드와 융이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양자 역학이나 카오스 이론이 감히 신성과 불성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들어갔듯이, 오늘날에는 꿈이라는 ‘애매 모호한 것’도 하나의 상표로 등록이 되어, 연구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꿈은 여전히 미지수인 거대한 산맥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꿈의 학문은, 다른 학문에 비하면 아직도 유치원 단계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꿈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뿐, 도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캄캄 절벽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날씨도 예측하고, 갖은 정보를 다 입력함으로써 미래 정보조차 출력해 낼 수 있는 오늘날이지만, 오늘 밤에 어떤 꿈을 꿀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꿈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디에 빗대어 말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영화라는 것이 나와서, 참으로 적절한 비유의 대상이 생긴 셈입니다.

저 뒤쪽에서 불빛이 나와서 하얀 스크린 위에 비쳐지기만 할 따름인데도 그 그림에 따라 울고 웃는 그것이, 영낙없이 꿈의 닮은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광선이 지나갔을 뿐인데도 감정이 온통 사로잡히는 것이나, 그림이 다 끝나고 나면 그저 하얀 스크린뿐인 것도, 꿈의 허망함에 견줄 만합니다. 구경할 당시에는 별별 군데를 다 다니며 웃고 울지만, 우리를 웃고 울게 한 그 주체는 질량도 부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밤마다 영화를 상영하는 주체는 누구냐? 의식상으로는 내가 돌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이라고 하지만, 이게 과연 정확한 표현일까요?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혼수상태와 같다고 해야 할 텐데, 잠의 상태는 혼수상태와는 분명 다르단 말입니다. 잊어먹어서 그렇지,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닌 것이니, ‘무의식’이라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무의식’이 한 짓이라는 건 낮의 문화가 강조된 나머지 생긴 이름 붙이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낮 문화만 진짜라고 생각하고 밤 문화를 가짜라고 멸시한 결과입니다.

꿈이 ‘무의식’의 소산이라면, 왜 그렇게도 창조적이며, 왜 그렇게도 똑똑합니까? 빵점 짜리 학생도 얼마든지 백점 짜리 흥미진진한 꿈을 꿀 수 있으니, 이 신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사실, 핵폭탄이나 유전자보다도 더 관심을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면, 바로 꿈의 영역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명 창조는 꿈에서 시작되었다

미확인비행물체라고 이름 붙여 놓고는 다 알았다고 안심하듯이, 우리로 하여금 꿈꾸게 하는 주체를 일단은 X라고 이름 붙여 봅시다. X는 내 몸 바깥에 있는 놈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X가 꾸는 꿈 때문에, 사실은 인류 문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무와 바위와 짐승에게는 없는 X가 인간에게는 있었기에, 그림과 음악과 과학과 온갖 창의적인 것들이 나온 겁니다. X가 문명을 만들어 온 겁니다. 밤마다 창의적으로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상영하는 이 X가, 온갖 문명 창조의 영감을 제공해 온 겁니다.

고대에는 꿈을 잘 꾸고, 해석을 잘 하는 사람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구약성서는 꿈과 함께 만들어진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꿈을 얼마나 잘 꾸느냐에 따라 왕후도 되고, 요셉 같은 경우엔 총리도 되었습니다. 고대뿐만이 아닙니다.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아십니까? 그들 역시 꿈에 본 것을 잘 기억하고 활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벤젠의 분자 구조를 밝혀 낸 독일의 화학자도, 자기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을 꿈속에서 보고는 ‘벼락 맞은’ 것처럼 놀라 깨어나서는 고리 모양의 구조를 알아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문학 작품의 줄거리나 모티브를 암시 받은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인류 문명 전체가 인간의 표면의식이 한 일이 아니라 이 X가 해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물과 흙과 햇볕 밖에 없는데도 나무로 하여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하는 바로 그 근원의 힘이, 인간에게 들어와서는 꿈을 꾸게 하고, 문명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달걀의 모양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흰자와 노른자가 어떻게 해서 그 부피 그 질량 그 모양으로 갖추어지게 되었을까요? 닭대가리가 그 오묘한 것을 디자인한 것일까요? 천 년 만 년을 고민해도, 닭대가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곰곰 살펴보면 신비 아닌 것이 없는 이 요지경의 세상 뒤안에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그분이 인간의 꿈도 주관하고 있지 않을까요?

대낮에 우리끼리 나다, 너다 분별하고 따지는 표면의식이란 것은 대양 속의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성이라는 섬이 다도해처럼 대양의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을 뿐, 우리의 존재 전체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가려져 있습니다.

의식이란 출렁이는 파동이고, 꿈이란 의식의 밭에서 자라나는 잡초 같은 것입니다. 잡초에 불을 지르면 좋은 비료가 되듯이, 꿈을 잘 활용하면 우리 삶을 정갈하게도, 윤택하고 풍요롭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그걸 ‘꿈의 공학’이라고 불러 본다면 어떨까요?

꿈에 속지 말라

석가모니는 대낮의 현실도 꿈이요 심야의 꿈도 꿈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낮의 꿈을 여럿이 꾸는 꿈이라고 한다면 밤중의 꿈은 혼자 꾸는 꿈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인생이 한 마당 꿈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영혼의 차원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넥타이 매고 점잔 빼며 대낮의 연기를 할 때는 그게 꿈이라는 것을 발설하지 않기로 다 함께 약속한 것뿐입니다. 그 약속을 잊은 채로 꿈을 진짜인 걸로 알고 껌벅껌벅 속았다가도, 애인한테 차인다거나 파산 선고를 당해 하루 아침에 노숙자가 되고 나면 불현듯 모든 것이 다 꿈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곤 합니다.

어느 날 아침, 마당을 지나가는 제자를 붙들고 스승이 귀엣말을 속삭입니다.

“나 어젯밤, 기막힌 꿈을 꿨어.”
그러자 제자가 대꾸합니다.
“세수나 하시죠.”
스승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떠오릅니다. ‘그래, 넌 합격이다!’ 하는 안도의 미소겠지요. “차나 한잔 드시죠.” 이런 대꾸에도 역시 합격 판정을 내릴 겁니다. 하지만 “무슨 꿈이죠? 돼지꿈인가요” 하고 얄팍한 관심을 표시했다가는, 당장 몽둥이가 날아들 겁니다.

꿈이라는 게 무엇인가? 결국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의 수천 수만 가지 조합일 뿐이라는 입장도 들어줄 만한 것이 아닐까요? ‘했으면 좋겠다’는 욕망과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두려움 사이의 갖가지 순열 조합이 이 한 마당 인생이라는 꿈의 모든 것이라는 겁니다.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치지만 ‘종당엔 누구에게나 닥쳐올 죽음인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결국엔 물거품이 될 건데 무엇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인단 말인가? 그저 자연스럽기만 하면 되는 것을.’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말리지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이 인생을 통과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낮에 꿈이 될 만한 소재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꿈으로 보아야 합니다. 칭찬의 말을 들어도 우쭐하지 않고, 비난과 욕설의 말을 들어도 마음 상해하지 않는,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욕심의 대상도 없고 두려워할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 내적인 평화를 담담하게 즐기다 갈 뿐입니다.

둘째는, 어지러운 꿈이든 좋은 꿈이든 밤중에 꿈을 꾸지 않는 것입니다. 꿈이야 어차피 꾸겠지만 그걸 청소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요.

40여년 전의 청년 시절 일입니다만, 온몸에 진땀이 날만큼 무서운 꿈을 연속해서 꾸는 바람에 주님을 붙들고 늘어진 적이 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꿈 없이 달디단 잠을 자고 싶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 편히 쉬게 해주시고, 새벽 4시에 깨워 주신다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올리고 나서야 실로 몇 달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누군가 발을 거두어 차길래 번쩍 눈을 떠보니, 새벽 4시였습니다.

이처럼 꿈을 안 꾸는 상태의 평화를 며칠 누리다 보면, 낮에도 연연해하지 않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꿈의 공학’이라기보다는 ‘꿈의 위생학’에 가깝습니다.


“'꿈의 공학'은 꿈을 조절하고 관리함으로써
더 드라마틱하게 삶이 주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꿈의 엔지니어링

‘꿈의 공학’은, 꿈을 조절하고 관리함으로써 더 드라마틱하게 삶이 주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 방법입니다. 만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X로부터의 선물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축소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고, 나아가서는 X와 어깨동무를 나란히 하고 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꿈의 일기장’을 만들어 머리맡에 두고 즉시즉시 기록해 나아간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가져오고 무질서에 질서를 집어넣는 이 작업에는, 조건이 따릅니다. 좋은 꿈, 나쁜 꿈을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꿈이라는 것을 나 자신의 행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기억을 위한 연습 문제로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관찰하고 기억하는 연습을 통해서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나만의 특수 지역을 설정하지 않은 채, 기억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차차 세세한 부분까지도 되살릴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꿈 속에서도 꿈인 줄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대로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잠든 것도 아니요 눈을 뜬 것도 아닌 상태에서 꿈이 꿈인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아차리는 순간, 장면이 사라지고 맙니다. 장면이 사라진다는 것은 꿈에서 깬다는 것이니, 요리할 재료가 없어져 버리는 셈입니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장면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비법이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 미리 다짐을 해야 합니다. “꿈 속에서 내 손을 보겠다”는 식으로 의식 깊은 곳에 새겨두는 것입니다. 단단히 새겨넣지 않으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곤 합니다. 꿈에 손을 보겠다고 다짐하고 잠이 들었지만, 꿈 속에서 악수를 하는데도 자기 손을 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 순간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100만원짜리 수표를 준다고 합시다. 아무리 꿈 속의 일이라지만 너무 반가워 감탄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고, 그 순간 꿈 속으로 퐁당 빠져 버리는 겁니다.

어느 한 물상에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한 물상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역시 사라지고 맙니다.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꿈인 줄 아는 상태에서 계속 지켜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자면 초점을 맞추지 않고, 렌즈만 계속해서 ‘열림’ 상태로 두어야 합니다. 사팔뜨기가 되어 멀거니 지켜보기만 하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꿈 속의 장면들에 염력을 넣고 의지를 불어넣어, 임의로 장면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가 되어야 비로소 실재 세계로 가는 뒷문의 터널이 열린 것이고, 도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제서야 비로소 인생의 주인 자리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낮의 현실도 꿈이요 꿈 속의 일도 꿈인지라, 자유자재로 영화를 고칠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매트릭스임을 깨달아 매트릭스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낮에 10년, 20년 걸릴 일을 내일 모레의 현실로 바꾸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낮의 꿈이든 밤의 꿈이든,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내 의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꿈의 공학’입니다.

빈 그릇, 혼을 나누는 기쁨

이 몸뚱아리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딱딱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이 이미 증명한 바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실재와 환상의 차이가 모호해져 가고 있습니다. 물상이든 아니든, 현실 자체가 물렁물렁한 것입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파동일 뿐이고, 마야(Maya)일 뿐입니다. 뜯어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가 없는 것은, 고칠 수 없게 딱딱하다는 생각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야 할 산맥이 있다면 그런 고정관념뿐입니다. 딱딱해서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요, 물렁물렁해서 얼마든지 창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꿈이기 때문에 모두 다 헛것이라는 자리에 석가가 서 있다면, 꿈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하다는 자리에는 예수가 서 있습니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도, 벙어리의 입을 열게 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것도, 모두 다 꿈의 공학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 단백질 껍질도 꿈이니까 말랑말랑한 것이고, 말랑말랑한 것이니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고칠 수 있습니다.

석가는 살아 있을 당시에도 여러 제자를 두고 혼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지만, 예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돌탕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연민을 발휘하느라, 죽을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살아 생전 제자 중 누구도 깨달음에 이르는 꼴을 보지 못한 채, 부지런히 잠이나 깨워야 했고, 결국엔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습니다.

돌탕들을 물렁물렁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으로 덮치는 수밖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기다리라고 한 것입니다. “스타 워즈”는 이런 예수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칼 싸움을 하다 일부러 죽어서 4차원에 간 다음 다시 와서 아이를 돕지 않던가요?

기다림이라는 것처럼 막막한 것은 없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처럼 에고를 죽일 수 있는 묘안도 없을 것입니다. 몇 시에 어떻게 오겠다는 약속도 다짐도 없이 그저 기다리라고만 했으니, 제자들은 오죽 막막했을까요? 3년 동안 스승과 함께 하는 맛을 본 처지이니, 세상을 예전처럼 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스승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충격도 받은 터입니다.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오긴 와야 할 텐데,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에고를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비어 있는 그릇들에 혼이 덮친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예수께서는, 그런 작전을 쓴 것입니다.
그렇게 비어 있는 그릇이라야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늘과의 교감은 먼저 자신의 에고라는 그릇부터 비워야 가능해집니다.

밤마다 천문대를 열어놓고

지금은, 육체라는 이 단백질이 물렁물렁하고 속이 텅 빈 것임을 현대 과학이 알아차리게 된 희망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생은 짧고,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투성이입니다. 미지수가 세 개인데 방정식이 두 개면 풀리지 않듯이, 인생에는 끝내 풀리지 않는 고리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러니 이 인생에서 완전한 설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그 고리에, 채워지지 않는 그 자리에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풀 수 없는 고리 하나가 나로 하여금 우주를 향해 창문을 열어 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로 하여금 밤마다 꿈꾸게 합니다. 왜 인간은 해 뒤에 있을 때만 꿈을 꿀까요? 왜 별빛과 달빛 아래에서만 꿈을 꿀까요? 꿈을 꾼다는 것은 이 지구적인 현상일 뿐일까요?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는 이 현상이 우리 모두의 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일까요? 쉴 새 없이 출렁거려서 썩지 않게 하는 바다의 역할이, 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요? 우리의 감성을 좌우한다는 달도 없고 바다도 없는 행성에서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요?

지구 자체가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한 시간에 5.4회 꼴로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한 시간에 무려 36만 번이나 천둥 번개 현상을 일으킵니다. 공중과 지구의 이런 마사지 현상은 왜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이 인간의 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지구의 중심인 핵은 360년에 한 바퀴씩 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1609년에 갈릴레오가 지구 공전을 밝힌 이래 정확히 360년 후인 1969년에 인간이 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이 사실은, 그저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까요? 태양의 흑점은 11.1년을 주기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데, 왕성한 주기에 있었던 1990년을 기점으로 계산해 보면, 예수께서 태어나신 해도 왕성한 주기였고, 돌아가실 당시인 33세도 역시 왕성한 주기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인들의 복음서’에는 1990년에서 11년을 더한 2001년 9월 27일을 역사의 마지막 날로 기록하고 있으며, 마야의 달력에는 2001년에서 11년을 더한 2012년 12월 21일을 역시 마지막 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태평양 밑바닥의 암반을 조사한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자기가 지난 40만 년 동안 171번 앞뒤가 바뀌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북극이 남극 되고 남극이 북극 되는 대전환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자기가 바뀔 때는 자기의 수치가 점점 줄어들어 0에 이르는 시기가 있게 되는데, 그때에는 북극에서만 극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에서 찬란한 우주 쇼를 지켜볼 수 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돌연변이가 대량으로 일어나게 되어 종자 개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구 전체의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의 달력이 말하고 있는 2001년이나 2012년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키 작은 에고만 가지고 노는 일을 멈추고, 이런 우주적 큰 그림을 가지고 놀아야 할 시기입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큰 그림들이 주어지는 것은, 크나큰 변화가 밀려오고 있다는 신호이고, 거기에 나 자신을 열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꿈은 전날의 인간 관계나 희로애락의 찌꺼기만 상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역, 그 공간의 노래이자 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구인의 꿈은, 달과 바다와 대지의 꿈이기도 합니다.

밤마다 천문대를 열어놓듯 우주를 향해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우리는 꿈을 통해 자신들과 이웃들의 삶을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현실의 노리개가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다른 별에도 나들이하듯 놀러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는 문법도 다르고 중력도 다른 곳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즐길 수도 있고, 해가 둘이나 걸린 별에 가서 영롱한 햇살과 놀면서 우주를 내 품에 안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비어 있는 그릇의 기쁨은 무엇이든 바꿔 채울 수 있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이 우주 전체가 꿈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