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해야 한다는 귀신 - 단소


그날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 단소를 들고 갔다가, 한번 불어보라는 요청을 끝내 거절하고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갑자기 단소가 말을 걸어 왔다.

"어째서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곧잘 나를 불다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한사코 불기를 거절하는가?"
"내 비록 머리가 둔하기는 하지만 창피한 것쯤은 안다."
"무엇이 창피한가?"

"솔직히 내가 단소를 잘 불지는 못하지 않느냐? 게다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가만!"
단소가 내 말을 막고 단도를 찌르듯이 물어 왔다.

"자네가 왜 단소를 잘 불어야 하는가?"
"......?"

할말이 없었다. 내가, 이 아무개가 단소를 잘 불어야 할 까닭이 만고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소 연주가도 아니고 이른바 국악인도 아니다. 그냥 취미로 단소가 좋아서 들고 다니는 것뿐이다.

"......"
"자네가 단소를 잘 불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면, 자네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
"언제까지 근거도 없는 그 놈의 '잘해야 한다'는 귀신을 모시고 다닐 참인가?"
"......!"

그 뒤로 단소 불어보라는 청을 거절한 적이 없다.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광주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서도 불었고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에서는 유동식 선생님 고희 기념예배에 불다가 막판에 소리가 안 나서 중단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아아, 그래도 나는 창피하지가 않았다. '잘해야 한다'는 마귀가 떨어져 나간 뒤에 불어온 '자유'의 신선한 바람은 아직도 내 몸을 감싸고 있다.

글을 써도, 설교를 해도, 잘 쓰고 잘하려 애쓸 것 없이 다만 정성을 다하면 그뿐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신 단소는 나의 잊지 못할 스승이시다.

단소를 분다. 청아한 소리가 허공을 메운다. 자, 방금 이 소리는 어디에서 났는가? 누가 이 소리의 임자인가? 없다. 내가 소리의 주인이라면서 나설 그 무엇도 없다. 아무도 단소 소리의 임자가 아니고 모두가 단소 소리의 임자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무 데도 없고 없는 데가 없는 것이다.

단소 소리는 하느님 것이다. 단소 부는 나를 본다. 자, 이 '나'는 누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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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物과 나눈 이야기  / 이현주 목사님 지음 (이아무개라고도합니다)
에 나오는 '단소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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