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연적 삶

                                                                                                  강의 :         곽노순
                                                                                                 목사, 후기기독교연구실 실장  

* 이 글은 10월 26일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영성강좌에서 곽노순 목사가 강의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위의 예화 이외에 영성수련의 실태를 맛보게 한 이 강의를 향린교회 교우인 이진희씨가 만삭된 몸으로 풀었습니다.

                                                           -강의 내용 요약-

  몇 십년 전에 아프리카에 살던 사람이 누굴 따라서 유럽 여행을 했어요. 이것 저것 편리한 게 많은데 보니까 샤워기가 있었던가 봐요. 탁 트니까 물이 쏟아지는데, 참 좋더래요. 그래서 아프리카로 돌아갈 적에 그걸 하나 훔쳐 가지고 갔어요. 그리고 고향에 가서 벽에 붙였는데 '이게 안 나오는거예요.' 영성이라는 것은 벽에다 샤워 꼭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에요. 또 감옥소에 진짜 도둑질해서 온 놈하고 또 어떻게 해서 들어 왔는지 아무튼 철학 전공한 놈하고 같이 쓰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손발이 잘 맞아 가지고 어느 날 탈출하게 됐는데 이 두놈이 지붕의 기왓장을 살살 밟고 밤에 빠져 나왔어요. 앞에 물론 진짜 도둑이 앞장서고 철학과 출신이 뒤에 쫓아갔어요. 한참 가다가 도둑이 잘못 짚어서 기왓장 하나가 떨어지니까 지나가던 경비원이 "이게 뭐야?" 그랬더니 "야옹!" 도둑이 이랬어요. 또 한참 가다가 뒤에 있는 놈이 또 발을 잘못 디뎌서 기왓장이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이게 뭐야?" 가 아니라 "누구냐?" 그랬더니 "고양이에요."하는 거예요. 자연적인 삶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에서 '야옹' 소리가 나와야 되는 것이지 '고양이에요' 하는 문장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대학교수로 있었는데 한번은 동료가 임종을 맞았어요. 죽게 됐는데 자기 집으로 그 전에 좀 와 달라고 해서 갔어요. 그런데 죽는 놈이 가만히 보니까 위로의 말을 한마디도 안하는거야. 오죽 답답하면 죽는 사람이 '뭘 좀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게, 죽지 않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는 사람이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어요. "아니 내가 지금 숨이 넘어갈텐데 농담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그랬더니 "아니다. 진심이다. 안 죽어. 산적이 없으니까. 욕망과 후회! 욕망과 후회! 이렇게 떠내려온 삶을 너는 삶이라고 부르느냐. 당신 산적이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마. 결코 죽지 않아."했어요.

그때 이 사람이 펄펄 뛰다가 나중에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의 손을 덥석 잡고 "고맙다."고 그랬어요. "나는 삶도 삶처럼 못 살았는데 당신의 말이 아니었으면 죽음도 죽음으로 못 맞이할뻔 했다. 정말 고맙다." 그러면서 갔어요. 기독교인은 십자가를 너무 강조해서 안 죽어도 되는 것 같이 착각해요. 아니에요. 여러분 각자가 태어날 때 예수가 대신 태어난 게 아닙니다. 생(生)과 사(死)가 한 자가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대로 살아야 할 거예요.

  프란시스코 주립대학에 심리학 교수로 있는 빌로도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이 정글에 들어가 인디안 스승 밑에서 10년인가 약초의 심리적 효과를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정글로 제자를 끌고 들어가더니 "오늘은 너를 한번 테스트해 보는 날이다. 이 정글의 시끄러움이 멈추지 않은 채 걸어보아라." 하였다. 두발짝 걸었을 때까지는 동물들이 못 알아채고 시끄러웠어요. 근데 다음 순간 앵무새 소리도 멎었고 원숭이 소리도 멎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암만 해도 내가 향수 뿌리고 면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인디언들이 짐승을 잡아 놓은 것이 있기에 그것의 기름 조각을 가져다가 온몸에 칠하고 다시 해보았대요.

이번에는 세발짝 가는 동안 정글이 계속 시끄러웠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는 뚝 멈추더라는 거예요. 그래 스승이 얘길 했어요. "짐승이 네 몸의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네 속의 포악함과 난폭함을 알았다." 이 교수가 짐승의 시끄러움이 계속되게 하면서 걷는데 5년이 걸렸다고 자기 책에서 고백하고 있어요. "장로, 목사, 감독 또 총회장을 뽑을 때 이런 식으로 테스트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십시오. 또 100년 전 티베트에서는 자주 호랑이가 나와 동네 사람들을 잡아 먹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막았느냐 하면 그 곳 히말라야에서 도를 닦던 도인이 호랑이가 오는 성문 입구 앞에 드러누워 해결했다지요.

그걸 보고 서양 사람들이 "와,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나느냐" 그랬더니 "짐승이 사람을 아무나 먹는 게 아니다. 우리가 심심한 반찬은 안 먹고 양념이 잘 된 걸 먹는 것처럼 사람의 의식 속에 양념이 잘 된 것만 골라 먹는다는것이죠. 그 양념에 꼭 들어맞는 것이 '공포'다." 겁있는 것만 먹지 공포가 없는 것은 안 먹는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거기 드러누워 공포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타 생명에 대한 연민까지 느끼면서 "이제 그만해라" 하고 타이르면 말을 안듣겠느냐는 것이었죠.

우리 속의 두려움은 난폭함과도 통해요. 누가 난폭하냐? 겉은 아주 우락부락 하죠. 속에는 겁이 많은 사람이 그런 겁니다. 아무튼 자연적 삶이란 난폭함과 두려움이 씻겨진 인간을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 새 30마리, 50마리가 함께 비행할 때 이럴 것 같아요? "야, 왼쪽이야 왼쪽! 오른쪽이야, 오른쪽! 돌아 돌아." 아니에요. 전자 장치를 해 놓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전체가 한 혼인 양 도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기 때문에 여호와의 영성을 들은 것이에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이 여러분도 수없이 불렀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다 귀머거리니까 듣지 못할 뿐이죠. 문장이라는 건 가장 오해 덩어리예요. 인간의 언어는 거짓말하기 위해서 만든 걸 아시죠? 진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속이 꽉 차있고 가슴이 열려야 되는 것이예요.

미동북부에 메리디스라고 유명한 TV부사장이 어느 날 명상을 하다가 자기집 정원에 있는 완두콩을 앞에다 두고 고요히 있었어요. 며칠을 해봐도 아무 것도 안 일어나더니, 어느 날 눈을 감았는데도 앞에 초록색 물감이 퍼진 것 같은 게 흐릿하게 보이더래요. 그 다음에도 집요하게 했더니 그 초록색 물감 같은 게 더 뚜렷해지면서 자기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소리가 들렸어요. "그거 좋으냐?" "아니 싫어. 막 현기증 나고 그러니까." 그랬더니 "우리도 싫다. 그러니까 우리 울타리 좀 튼튼히 해라." 그 완두콩이 하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식물을 키울 적에 교과서 보는 게 아니라 그 앞에서 가만히 명상하면서 식물들의 충고를 받아가지고 기가 막힌 정원을 만들었어요. 에덴 동산이나 고대로 가면 이런 빌딩도 없고 글자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거짓말도 없었을 그 때는 삼라만상이 홀연히 전체로 살고 있었기에 전체가 다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시대가 얼마 안 있으면 오게 돼있어요.

왜냐? 문명의 극치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차면 기우는 법이예요. 환경 보호라고 하는 것은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이 땅과 협력해서 이루는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에요. 식물, 동물, 광물, 산, 강, 지구와 대화하는 인간이 배출될 때만 홀연히 낙원이 되지. 모세가 야훼께 경청하듯이. 이 지구의 소리로 나무의 소리로 짐승의 소리로 듣는 겸허한 자세를 가질 때야 홀연히 우리가 지구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