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악수를 할때 그사람의 표정과 말투와 순간적인 행동을 보고.....
이미 그 사람이 아닌 내가 판단한 또 다름 사람을 만들어 내곤합니다.
그것이 부정적 시선이든 긍정적 시선이든 내 속에있는 편견의 잣대와 에고의 칼을 가지고
상대를 그어 대서 자기가 생각한 옷을 만들어 자기의 영상에 맞춥니다.
그리고 그사람을 만나는 순간에는 내가 만든 옷을 입힙니다.
그것이 긍정적일때는 그를 친창하고 즐거워하지만 내가 만든 옷을 입지 않을 때에는
그를 미워합니다.
또한 그가 내가 만든 부정적인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볼것없이 그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옷은 그와 전혀 다른 옷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애에(자기애는 변형된 외로움일 수도 있습니다) 대한 집착이 강해서  자기뿐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합니다.
심지어는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말을 끌어오기도 합니다.
가령 사랑이라는 말,천사라는 말, 악마라는 말,너희는 모른다라는 말,죽음의세계,우주......
물론 그것도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나오는것도 비슷합니다.
그가 내가 원하는 바라는 행위를 하지 않자 스승을 죽이는 그런것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바라보는 그가 아닐수 있습니다.
광신도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개신교의 종파가 1000여개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그것도 20여년전에 책에서)
지금은 몇개가 될른지 모릅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각자의 에고의 옷을 입혀 놓았습니다.
우상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우상입니다.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 재단하는것은 인줄 모릅니다.
이집트 신화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더군요.
사막 오아시스 옆에 집이 한채가 있는데  그곳에는 큰 거인이 주인인데 먼길을 여행한 대상들을 위한
방에 침대가 있는데 누구나 잘 수 있는데 키가 크면 자르고 키가 작으면 늘린답니다.
결국 그 방안에 자는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지요.

어떤 사람이 장애아가 있는데 그것을 부정했을 때 너무 힘들었는데, 그것을 긍정하는 순간 모든것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만약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또한 성장을 위한 변화와 고통을 바라볼 수 있다면,수 없는 성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  
그것은 지혜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라즈니쉬의 글속에 어두운 방안에 아무것도 볼수없고 더듬어서 찾을 수 있겠지만 불을 밝히자 어두운 방안에모두것이 한순간 보인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것이라는 것은 자신의 방안을 환히 밝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