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피운 꽃

오늘 아침은 대지에 남아 있던 여름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간 듯 바람이 한결 맑고 청량합니다.
지난 여름 한철 열이 오른 사람들의 머리를 잠시 떼어내어 저 바람에 헹구고,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본 눈일랑 잠시 빼내어 저 하늘에 담궜다 끼웠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계절의 순환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고, 한 계절을 보내고 날 때마다
인생이 참 덧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고 햇빛의 열기가 사그러들고
나무들이 옷을 갈아 입지만, 그것이 자연이라는 한 몸의 다른 얼굴이듯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 순간 지금 여기의 삶을 살지만 동시에 영원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되,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딘 채 이상을 향해 살아 가는 것,
이것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지요.
지금 이 순간도 우리 감각으로 느낄 수 없을 뿐 지구는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몸을 지니고 사는 동안은 현실에 정확하게 발을 딛고 살아야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감의 세계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을 바라보고, 또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살면서 왜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이 없겠습니까?
다만 영원한 생명의 실상에 크게 눈뜬지라 그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냥 느끼며 갈 뿐이지요. 우리 안의 영원성을 깨달을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개인, 국가, 종교의 문제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모드가 다 하나인 것을 알기 때문에 진정으로 홍익弘益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내 안의 영원성을 믿고 이 세상에 내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수행인으로서 왔다는 자각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외로움과 슬픔과 분노와 기쁨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꾸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안의 영원성을 깨우친 사람은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결국은 내가 궁극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늘이 예비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만남이라도 소홀히 할 까닭이 없고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헤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남 속에서 자기한테 떨어질 '이익'을 계산하느라고, 탐색하고 으르렁거리느라고
만남의 참의미를 잊은 채, 이해관계 속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욕하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우주의 신성과 연결된 영원한 존재임을 자각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을 구걸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으며, 어떤 길이 바른 길인지 알 수 있는 눈이저절로 열리게 됩니다.
행복과 평화를 찾아 온갖 길을 다 쫒아다니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힐 리 없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자각에 이르면 남에게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살지 않으며,
남이 떠드는 진리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 모습대로 활짝 피어나, 도금을 하지 않은 '순금'의 찬란함으로 빛나는 것이지요.
우주의 신성과 하나되는 것이 곧 평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큰 우주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야말로
평화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지요.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원인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 물질 세계의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인 세계, 마음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물질 게계의 삶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후자의 세계를 바꾸려면 먼저 전자의 세계를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병과 고통의 진짜 원인은 혼란스러운 정신과 감정 상태에 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악조건이나 힘든 일들도 우리의 삶이 그것을 초대하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법이지요.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형태로 존재하는 영靈들이 수없이 많으며, 우주는 당연히
그들이 보내는 온갖 파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같은 것끼리 끌어당기는 끼리끼리 법칙이 쉼없이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이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이나 삶의 형태에 가장 많이 닮은 파장을 우리 주위로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지요.

마음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연결하는 법칙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근심에 젖어 있는 사람한테는 늘 근심스러운 일만 생깁니다. 용기 없고 기죽어 지내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하기 쉬우며 다른 사람한테 의지하여 힘겹게 살아갑니다.
반면에 희망차고, 자신감 넘치고, 용기 있으며, 목적이 분명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성공을 부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 일의 잘 되고 못 됨, 주위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전부 우리의 생각 하나하나에 달려 있지요.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우리의 정신은 그 상태에 어울리는, 눈에 안 보이는 물질을 끌어당깁니다.
얼마만큼 강한 기대를 갖고 계속해서 확신을 불어 넣느냐에 따라 그 확신에 의해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로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감각을 통해 물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듯이 영감은 우리의 영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이해하는 힘입니다.
말하자면 영감은 우리 속 안의 영이 가진 감각, 판단력입니다. 인간은 영감을 통해 자신과 이 세상 모든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되며,
우주의 영원한 힘에 자신을 내맡겨 자신 속에 있는 그 생명력을 마음껏 꽃피울 수 있습니다. 육체의 감각이 바깥을 향해 열려 있다면 영의 감각은 내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이지요.
이 영감은 주위의 온갖 정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곧바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꽃을 피우며 삽니다.
웃음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분노의 꽃을 피우기도 하고 절망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요.
그 동안 나는 주로 어떤 꽃을 피워왔는가? 희망과 웃음과 긍정의 꽃을 피웠나, 절망과 분노와 부정을 꽃을 피웠나
스스로에게 물을 일입니다.

우리가 피운 꽃은 저마다의 향기를 내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영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 하나하나,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영원한 우주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생각이 모이면 그것이 염체念體가 되고 그 염체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를 사로잡아,
보이는 세계의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분노와 절망의 꽃은 우주를 떠도는 동일한 에너지를 함께 불러 우리를 지배하고, 기쁨과 희망의 꽃은 그러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기쁨과 희망을 복제하고 있습니다.

이 엄정한 우주의 법칙에 소스라치게 놀라본 사람,
우리 안의 영- 그 속 사람과 내밀한 대화를 나눠본 사람은 압니다.
이왕이면 아침마다 찾아와 우리를 깨우는 저 바람처럼 살다 가야 한다는 사실을,
나를 깨우고 더불어 다른 사람을 깨우는 세상의 향기로 살다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새벽 산책 중에서/ 김수덕 명상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