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연스럽게 노래의 날개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하세요♡ - 대지의 천사 -
안타까움
                      강 재 일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던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욕심 이다.
사물을 소유 한다는 건 다른 표현으로 “주인 되는 것”이다.
주인이란 그것의 주인노릇하기 위함인데, 세상의 모든 주인들은 그 주인노릇에 소홀하다.
소홀 한 게 아니라 주인의 역할을 모른다는 말이 맞다.
그 진정한 뜻을 안다면 그토록 기를 쓰며 주인이고 싶어 할까?
진정한 주인이란 자기 자신에게 주인노릇 할 줄 아는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한데도 세상 만물의 주인.
그들은 진정한 자기의 주인 되기에는 생각조차 없다.

그래서 주인 행세하는 인간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함부로 유린해 댄다.
파 엎고, 무너뜨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 오만 속에서도 늘 당당하다.

때문에 신은 가끔 인간의 오만을 힐책한다.
파 엎은 곳에선 파 엎은 대가를,
무너뜨린 곳에선 무너뜨린 대가를,
그리곤 죽인행위에 대해서는 죽인 것에 상응한 대가를.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그런 대가를 대가인줄 모른다.
모르기에 또 파 엎고, 또 무너뜨리고, 또 죽이기를 반복한다.
그 대가로 대가는 대가대로 늘 곱절이다.

그리고 신은 가끔씩 인간의 한계를 꾸짖기도 한다.
자연이란 것은 존재하는 모두라고 암시 하면서.
주인노릇은 진정한 주인의 자격을 가진 자가 해야 한다고.
주인 될 자격 없는 자가 주인노릇 하는 건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신의 암시대로 세상의 모든 주인 될 것들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인간을 보라.
될 자격을 갖추는 데는 소홀하면서도 노릇하기에는 죽기 살기다.
그러면서 그들이 생각해 낸 고작의 “행위”가 “삶의 경쟁”이다.
그런 경쟁 속에선 인간도 한 낱 만물의 일부일 뿐인데도 그걸 알리 만무다.

요행히 인간은 두발로 걷고 두 손을 사용 할 수 있어 다른 모든 숨탄것들에 비해 유리한 입장이다.
뿐만 아니라 사고(思考)할 수 있는 두뇌를 가졌다는 건 핵무기를 가진 것 이상으로 유리하지 않은가.
해서,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주인행세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란 단지 부리고 행세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보살펴야 하는 관리의 의무도 함께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주인은 그런 의무에 너무 인색하다.
주인의 인색한 의무 불이행에 주인으로부터 다스려지는 모든 것은 때로는
재앙이란 피켓을 들고 자기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엔 하고많은 불평과 불만이 누리에 가득하다.
그 가득한 불평불만은 怨이 되고 恨이 되어 결국엔 하나의 힘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힘은 자연적으로 주인 노릇에 게으른 인간에게 응징으로 다가오지만 그 응징을 인간들은 같은 방법으로 곱절로 되돌려 주기만 한다.
한번 터진 둑과 한번 무너진 다리엔 곱절의 시멘트와 곱절의 철근이 부어지고 세워지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불만은 또 다른 불만을 부르고 그 불만은 곱절로 불어난다.

왜?
어떤 연유로 인간이 꼭 이 지구의 주인이어야만 할까?
이것이 모든 것에 군림만 하려하는 인간에 대한 “깨달은 자”의 회의다.

만약.
정말 만약에.............
인간보다 엄청나게 능력이 뛰어난 이를테면 아이큐가 1,400 이 넘는 외계인이 어느 날 지구를 점령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 인간을 우리가 가축 부리듯 해 댄다면. 그때 우리 인간이 겪어야 하는 참상은 어떠할까.
아무리 뛰어난 두뇌로 그들을 꼬드기고 온갖 뇌물로 회유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의 한계일 뿐, 우리 인간들의 얄팍한 권모술수는 그들에겐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장난쯤으로 그게 어디 통하기나 하겠는가 말이다.
적어도 우리주변에서 잘 났다고 나선 주인행세에 입맛들인 위정자들과는 차원이 다를 테니.

어느 과학 잡지에서 밝히기를, 우리들이 사는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는 은하계에 수십 억 개가 있고, 그런 은하계마저도 수십 억 개가 존재한다고 하니 아연실색할 뿐.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무지한 행위가 그야말로 얼마나 커다란 죄악의 근원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실로 인간이 육감으로 느끼는 것.
그 밖의 실체에 대해 우리 인간들은 인정하기조차도 꺼려하지 않는가.
등골이 으스스해 진다.

언젠가 읽은 글 중에 "개미와 지렁이"란 게 생각난다.
죽은 지렁이와 그것의 살점을 물어 나르는 개미와 그런 일개미들의 평화를 위해 초병 역할을 하는 개미군단.
태양을 등에 지고 그것들을 물끄러미 내려 다 보는 인간의 시선.

뙤약볕아래 먹 거리를 구한 일개미들의 분주한 작업장을 누군가가 보지 못하고 그냥 밟고 지나갔다면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순간 그 아수라의 일촉즉발위기에서 지렁이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고 있는 개미들의 몸놀림을 유심히 지켜보는 인간의 눈길은 과연?

그 개미가 우리의 다른 모습이고, 그 지렁이 역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 런지.
햇볕을 가린 인간의 지켜봄을 다만 구름이 낀 것쯤으로 생각해 버리고, 순식간에 한쪽 발의 힘만으로 그들의 모두를 뭉개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 한 채 자신들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안타까움은 배움으로 드러난다.
배움이란 깨어나기 위함이다.
깨어난다는 건 무지로부터의 벗어남이 아닌가.
무지에서 탈출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게 깨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안의 모든 것을 비워내야 한다.
마음속의 모든 욕구를 걷어낼 때 그 때야말로 비로소 인간의 본성이 쨍~하고 빛날 것이니.

자기의 주인이 되자.
그것이면 족하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이젠 욕심을 걷어 내고 그 욕심을 들어낸 보물창고에 자신을 채워 넣자.
그 밖에 더 무엇을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