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연스럽게 노래의 날개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하세요♡ - 대지의 천사 -
9월 기행
                                                                        강  재  일

원주에서 마산으로 오는 차편은 좌석도 마음도 여유로웠다.
서울로 가서 다시 강남터미널까지, 그리고 밤 11시까지 기다렸다가 통영 행 심야버스를 타야 하는 부담이 목에 가시처럼 거북했는데 마산까지 갈 수 있는 직행 버스가 있다는 것이 의외였기에 동행했던 차를 놓쳐버린 아쉬움이 덜했기 때문이다.
차창에는 가을비의 몸 비빔이 홀로 안타깝다.
간혹 철 이르게 지고 있는 낙엽만이 가을비의 안타까움을 식은 몸으로 안을 뿐 우리를 태운 K여객 고속버스는 무심히 그것들을 스쳐 달린다.
갑자기 물 빠졌던 바다에 밀물이 들이치듯 발끝으로부터 피로감이 밀려온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의 한쪽을 뒤로 젖히고 몸을 눕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감긴다.
감긴 눈 속으로 2박 3일의 하루하루가 새록새록 새겨진다.
오른쪽 좌석 밑으론 J사장 사모님께서 정성들여 만들어 주신 감자전의 열기가 매력적인 P의 작별인사를 더불고 스물 스물 피어나는데.  

금요일 오전.
일주일 전부터 계획한 C형과의 약속대로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통영에서 출발을 서둘렀다.
대강의 채비를 차리고 약속장소엘 당도하니 폐차장에서 주워온 듯 어디한곳 성한 구석이 없는 낡은 차 한대가 털털거리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늘어놓는데도 이렇게 낡은 고물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에는 아무리 물질에 잡히지 않는 선비라지만 자신이 없다.
얼마를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스러운 이 차를 타고 그토록 먼 길을?
하지만, 60을 넘긴 나이에 스스로 궁상을 떨망정 남에게 신세지긴 싫었다란 말에 공감이 가기에 썩 내키지 않은 몸을 실었다.
키를 꽂고 시동을 걸자 잠시 쿨럭 거리다가 숨이 멎는다. 시동이 꺼져 버린 것이다.
“에 ~ ㅇ............???”
“귀한 분을 모시는데........... 내 형편이 이러니 우찌 하것소.
담에는 벤츠로 모실께.”  잔뜩 배인 얼굴의 주름 사이로 6순 노인의 겸연쩍음이 냇물 져 흐른다.
“그럽시다. 남의눈엔 어떻게 뵐지 몰라도 우리는 벤츠라고 생각하면 될 거 아니요. 까짓거!”

사천을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 장거리 여행을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기에 진주톨게이트부근의 주유소엘 들렀다. 그런데 실 수 없어 보이는 C형이 LPG가스충전소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뱃살이 유난스레 도드라져 보이는 충전소 아줌마가 의아한 듯 말을 건넨다.
“이차가 가스 넣는 차 맞습니까?”
누더기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이 양반들은 정신도 오락가락 하는가? 의아하게 꼬나본다.
“그런 줄이야 알죠. 그런데 빨간 모자만 보면 주유구(注油口)를 여는 차가 있더니, 이기사분은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어째 주유를 하고 싶은가 봅니다.”
SK주유소 광고 내용을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내 위트가 차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는 충전소 아줌마의 표정이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다.
하기야 연자매보다 두툼한 엉덩이에 기름때까지 줄줄 흐르는 중년아줌마를 ‘아름답다’는 수식어 한마디로 간단하게 뱃살 제거수술을 해 줬으니.
사람들이 인색한 세금 붙지 않는 칭찬에 내까지 덩달아 인색해야 할 이유가 뭔가.
한번의 윙크와 주름 가득 배인 C형의 너스레 한마디를 뒤로 흘리며 차를 후진시켰다.

대진(대전과 진주) 간 고속도로와 원주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중앙고속도로에선 오롯한 둘만의 시간이었다.
C형을 처음 만난 건 친구네 금방에서 시계점포를 하고 있을 80년대 초.
그러니까 대충 잡아도 알고지낸 세월이 스무 해를 넘겼다. 하지만 그간 절친할 만큼 특별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사이가 누구에게 들킬까 조심스럽게 묻어 두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하나 둘 풀어내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동작과 작동”, “중용(中庸)” 등의 질문에 구체적 예를 들며 설명 하는 가운데 상당히 가까워 져 가고 있었다.
원주에 도착하여 J사장과 서로 소개를 시킬 때는 벌써 두어 번이 넘는 강산 바뀜의 세월을 돌려놓을 만큼.

이 에프 소나타 골드.
주행거리 4만 킬로가 못 미치는 P님의 새 차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아무래도 운전경험이 많은 내가 빗길운행을 하기로 하고 포지션을 바꿨다.
그런데 이상하다. 처음 잡아보는 핸들인데도 어쩐 일인지 손에 익다.
우리가 타고 왔던 ‘프라이드 벤츠’는 두고 가자했으나 C형은 끝내 그 차를 가지고 갈 거란다.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갈 때도, 강릉으로부터 대관령을 되넘을 때도 비는 계속되었었다.
그랬었다.
원주를 경유하는 영동고속도로.
그 고속국도를 칠부 쯤 달리다 보면 강릉에 닿기 전 7개의 터널을 거느린 대관령이 있다.
예전의 꼬부라진 길을 반듯하게 만들다 보니 굴 하나에 다리하나다.
산을 깎아 길을 내기엔 마땅찮은 곳이라 산과 산을 그리고 계곡과 계곡을 연결한 것이 아예 은하철도 999를 연상케 한다.
14.4 킬로미터라 하지만 그 곳은 유난히 안개가 많아 낮에도 점멸등을 밝혀야 할 정도라서 여유를 가지고 핸들을 잡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맘씨 넉넉한 CH사장은 일찌감치 경포해수욕장의 현대호텔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통영에서 출발하기 전 미리 연락을 해 뒀기 때문이다.

비를 담는 경포호수엔 물오리 두엇이 서로를 끼고돌며 크라우드 나인에 열중이다. 우리가 차를 세운 호텔은 경포해수욕장을 품에 안은 채 탈색된 몸뚱이를 비에 적시고 있었다.
그 젖은 호텔 로비로부터 온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미소수산의 주인이 자글자글 미소를 흘리며 우리 일행을 맞는다.
역시 미소는 이름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소스처럼 흩뿌려야 하는가보다.
별실 로비에서 버섯 덧 밥으로 때 넘긴 점심을 먹은 후 잠시 P씨랑 해안을 거닐었다.
바다 사업에 관련하여서는 두 당사자끼리의 자유스런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좁은 수로를 끼고 대밭 길을 거쳐 비 내리는 솔숲을 조심스레 걸으면서 강릉이 무척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사업 얘기는 별 신통찮은 느낌이다.
사업의 스케일이 맞지 않음일까.
스산한 기분에 괜히 맘조차 울적해진다.
이런 기분으로 어딜 가랴.
못다 편 호연지기가 아직도 피울음을 우는 교산(허균)의 넋이나 더듬어 볼 량이다.
CH사장은 요행이 다방면에 박식해서 좋다.
뜻까지야 모르겠으되 적어도 말은 통하는 이를테면 코드가 맞는 사람이라서 말이다.

교산 허균의 생가.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으로 두량 없는 학문의 경지는 물론이요, 문드러져 냄새나는 세상을 탄하며 모반의 기염을 토하던 그의 당당한 기세를 기대하며 문설주를 넘었다.
그런데, 거기엔 비를 피하기 위한 차일 밑으로 어떤 의식을 준비하느라 삼삼오오 분주한 손들만 있는 게 아닌가.
대청마루에선 백일장 결과를 채점하는 심사위원들의 부산함으로 앞뜰까지 어지럽고.  
마침 관동대학 이모교수를 만나 본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강릉대학교 철학과 박양자 교수와 최선윤 추진위원장을 소개 받았다.
희끗 희끗 반백의 파머 끼 없는 머리가 유난스레 회청색 한복과 잘 어울리는 박 교수로부터 본 사업회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들었다.
허균, 허난설헌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기 위한 선양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하여 매년 9월 둘째 주 주말을 제일(祭日)로 정해놓고 각종 문화 행사를 치러 온지 올해로 6년째를 맞는다고 했다.
주요 행사내용은 허균의 사상 강연과 난설헌 선양 여성 백일장, 그리고 홍길동 가장행렬, 허균. 난설헌 시 낭송회, 초당 솔밭 음악제, 교산선생 추모제, 난설헌 蘭 그리기 대회, 홍길동을 주제로 한 만화 그리기, 인형극, 무예 등 그 외에도 시민평가대회까지 본 문화제의 한 부분으로 참여시킴으로서 명실상부한 강릉시민의 축제가 되었다는 설명까지 덧 붙였다.

교산이 누군가.
한때 국문학을 수학할 당시 어떠한 요소들도 가두지 못한 그의 자유분방한 삶과 어려운자들의 측근이 되어 그들을 보살펴준 의리를 눈물로 흠모했던 그 어른이 아닌가.
허엽(許曄 1517∼1580 중종 12∼선조 13)의 셋째로 몸을 받아 천부적으로 타고난 학문적 기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스승 이달(李達)과 형(허봉), 그리고 누나(난설헌)와 외숙(심우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들 하나 기득권을 가진 자로서 서출들과의 격의 없는 어울림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자체가 가히 파격적이요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 만인가.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받던 불교를 신봉했고 ‘천지사이의 괴물’ 로 낙인찍힐 때 까지 그의 이단적 행동은 당시의 권문세도가들의 오금을 얼마나 저리게 만들었을까.
눈에 거슬리는 사회적 모순과 타락한 정치적 부패를 질타하며 몸을 던져 개혁을 주창하는 실천적 삶을 살아가는 그는 진정한 개혁정치가요 국방의 이론가였으며 진보적 종교가요 뛰어난 문학도였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난세의 영웅으로 중국에 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 하니.

아직도 그의 삶에는 분분한 의견들이 많지만 그래도 분명한 하나는 기준격의 모함으로 이이첨 일당의 칼날에 몸을 맡기기 까지 정 3품 당상관의 자리를 몇 번씩이나 오르내렸던가. 그의 걸출한 문재를 눈 흘김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그가 모함의 무리들과 타협하지 못한 채 세속의 진애를 겉옷처럼 벗어던지고 대 자연의 풍운과 어울려 초연히 살려했음은 약삭빠른 현실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한 거사(居士)였음이 분명하다.
그의 시와 산문들을 모아 엮은 “성소부부고”를 譯한 ‘숨어사는 즐거움’의 한 대목에서는 아직 쉰을 넘지 않은 스스로를 성성옹(惺惺翁)이라 칭하며 “어느 날 소나무 아래를 지나는 선비를 맞이하여 같이 자연을 노래하고 싶다”는 소박한 포부를 밝히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끊이지 않는 정쟁(政爭)속에서 벼슬의 부침(浮沈)도 잦았지만 세리(稅吏)의 직책으로 남도지방에 잠시 머물 때 촌은(유희경 : 조선중기의 시인)을 잃고 시름에 잠겨 사는 희대의 명기 매창(李梅窓:계생또는 계랑이라 불렸으며 황진이와 같이 妓女문인)의 말벗이 되어 애절한 사연을 담은 시문을 주고받으며 서로 서로 상처받은 마음들을 어루만지던 그 로맨스는 지금도 눈에 잡힐 듯하다.  
여기서 어찌 매창의 이화우(梨花雨)를 빼고 갈 소냐!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매창이 유희경을 보내면서 읊은 시다.
허균의 문집에 그녀와의 정담을 실은 글이 전해지는 걸 보더라도 사대부와 기녀와의 일반적인 바람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의 누이 초희(楚姬 : 난설헌)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천품을 어찌 필설로 감당하겠는가마는 여덟 살에 [광한전백루 상량]을 지을 만큼 글재주도 신동이었다 하니.
그것도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의 어깨너머로 익힌 글을 바탕으로 말이다.
지금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야산중턱에 스물일곱이란 만개하지도 않은 꽃봉오리로 지하의 습기를 머금으며 아직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를 부르짖는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지켜보고 있을 그녀.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운 후 213수나 되는 주옥같은 글을 남겼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육중한 그 무엇이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교사(絞死), 존경했던 스승 이달의 좌절,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등.
자기의 시대를 고뇌하면서 그런 시대적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 만이 추앙받는 오류는 이제 걷어내야 한다.
그런 장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좌절해야만 했던 당신의 절망을 우린 기억하리다.

남편 김성립의 변변치 못한 능력 때문에 그토록 출중한 난설헌의 재주는 오히려 그들의 금슬을 갈라놓는 갈등의 텃밭이었으며 시어머니와의 불화를 자초하는 아궁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존경했던 수제자 플라톤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 인으로 태어난 것과,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3가지를 자기는 행복의 잣대로 삼는다는 말이.
그런데 난설헌의 가슴에는 하고많은 나라 중에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난 것과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수많은 남자 중에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3가지의 恨이 장마철 비구름보다 짙게 깔려 있었다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녀의 봉건사회에 대한 부녀자로서의 怨情을 노래한 대표작으로 대학입시에도 자주 출제되는 규원가(閨怨歌)야말로 유교사회의 폐습인 남존여비, 여필종부란 규범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한 인간으로서의 한을 애절한 서정에 담아 품격을 잃지 않는 시풍으로 풀어내었기에 더욱 돋보이는 게 아닐까.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진도명창 박병천 선생께서 문하생과 같이 씻김굿판을 벌인단다.
웬 횡재랴!
역시 사람은 느낌이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게 맞나보다.
안과 밖이 두루 밝은 미인은 흔치않은 법.
같이 동행한 P와 CH씨야말로 바로 그런 미인들이다.
그칠 줄 모르는 비.
그 비를 동무삼아 저물어가는 경포의 초당 솔밭에서 우리의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자근자근 내리던 비가 죽은 사람 영혼의 부정을 씻어주어 극락으로 천도하고 자손의 발복을 기원한다는 해원 굿, 오구굿이라고도 불리는 씻김굿판의 준비과정을 촘촘히 지켜보고 있다.
훤훤한 외모에 반듯한 이목구비하며 차림새도 세련된 인간 박병천은 1933년 11월 18일생으로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박범준(대금의 달인)과 김소심(선굿의 명인)의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단다.  
7살 때 농악단의 舞童을 할 만큼 그는 태어 날 때부터 끼를 지닌 듯.
11살 때 조리중 춤과 굿거리 춤을 배웠고 목포상업학교를 다닐 땐 유명한 국악인들 밑에서 장고와 춤을 익히면서 모친으로부터 사설까지 익혔다 하니 선생의 어릴 적이 대략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스승들로부터 농악장구와 장구 뺑뺑이 질, 소고놀이, 북 놀이를 배워 198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72호 진도 씻김굿 보유자로 인정받아 지금에 이르도록 외길로 이것의 전승에 열을 올리는 그가 지금 펼쳐보이고자 하는 진도 씻김굿이란?
일반적으로 씻김굿이란 망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한을 풀어 줌으로서 극락왕생 하도록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타지방의 굿은 무당이 무복을 입고 북이나 작두위에서 걷는 등의 사술적인 행위와 망자의 말을 전하는 것인데 비해 진도의 씻김굿은 평상복 차림으로 춤과 노래로써 죽은 자와 후손이 서로 만나게 한다는 것에서 차이가 난단다.
특히 이 굿은 행해지는 장소와 시기에 따라 그 명칭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초상이 났을 때 출상전날 시신을 옆에 두고 하는 ‘곽 머리 씻김굿’, 죽은 지 1년 되는 소상일 밤에 하는 ‘소상씻김굿’, 죽은 지 3년 되는 대상날 밤에 하는 ‘대상 씻김굿’, 집안의 우환이나 가족의 액 막이를 위한 ‘날 받이 씻김굿’, 장묘를 한 날 밤에 치루는 ‘초분이장 씻김굿’, 조상의 공덕이나 마을에 경사가 있을 때 그것을 조상의 은덕이라 생각하며 올리는 ‘경사 굿’, 물에서 익사한 자의 넋을 건지는 ‘넋 건지기 씻김굿’, 처녀나 총각으로 죽은 몽달귀신끼리 짝을 맺어주는 ‘결혼 굿’등등.
그리고 이 굿의 순서는 조왕반- 혼맞이- 안당- 초가망석- 처 올리기- 손님굿- 제석굿- 고풀이- 영돈말이- 이슬털기- 왕풀이- 넋풀이- 동갑풀이- 약풀이- 넋올리기- 손대잡이- 희설- 길닦음- 종천 순이란다.
그 중에서도 오늘 벌릴 고풀이는 허균과 난설헌의 극락왕생은 물론 문화제 행사 때마다 비가 내려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다음번부터는 마른땅에서 祭를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축원까지 아울러 주기를 부탁했다.

난 주제도 넘게 제물(祭物)이 채려진 제상 곁에서 편안하게 책상다리를 한 채 자리를 잡고 굿판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장고를 잡은 손에 쥘 채가 쥐어졌다. 나는 듯, 춤추는 듯, 부딪는 듯, 때리는 듯, 어루만지는 듯, 쓰다듬는 듯, 흘러내리는 듯, 치솟는 듯 그야말로 자유자재다.
부드럽고 유장하며 애간장을 쥐어트는 슬프고도 애잔한 이 흐느낌이여!
“가그라~ 가~ 가~ 가~ 하늘로 가그라~이~~어이~ 어이~ 어여~어여~ 하늘로 가그라~~”

걸쭉한 육자배기가 시나위의 선율을 타고 진양흘림으로 흐르는가 싶더니 살풀이 떵떵이로 굿거리장단을 타다가 중모리로 자진모리로 중중모리로 넘나든다.
들썩 지끈 어깨도 손가락도 팔목마저 시려온다.
굿 꾼들의 유희 너머로 P씨의 엉덩이도 들썩거린다.
역시 남다른 매력이 있기는 있는 사람이다.
미리 준비한 대자리에 망자의 바지저고리를 벌려놓고 그 위에다가 밥 식기에 보관 했던 종이 인형을 얹은 다음 둘둘 영돈말이를 하고 나서 꺼먼 솥뚜껑을 덮씌운 채 이슬 털기를 시작한다.
미혼인 망자에겐 바가지를 씌운다더니.
알고 보니 이 대목이 씻김굿의 중심이란다.
산에 올라도 염불이요 집에 들어서도 염불이라며 노래와 장단과 몸짓을 한데 어우려 이세상의 모든 더러움은 쑥물로 씻어내고 썩은 냄새는 향 물로 다스린 후 맑은 물로 헹구어서 깨끗하고 청정한 보살 세상 만들고자!

긴 무명베에 여러 개의 매듭을 매어 놓고 그것을 기다랗게 늘여 잡게 한 다음 나머지 한 끝을 왼손으로 틀어쥐고 오른손엔 넋전 들고 조무들을 쓰다듬으며 무가를 부르다가 염불을 외다가 떵떵이 살풀이로 춤을 추기도 하면서 차례차례 고를 흔들어 이승에서 맺은 한을 한 가닥 한 가닥 풀어 나간다.

“어하~ 어하~ 어 허 야~~ 어하리 넘차~어허넘~.
북망산이 멀다더니 눈떠보니 북망이네~
어허~ 어허~ 어 허 야~~ 어하리 넘차~ 어허넘~.
넘차~ 넘차~ 어하리 넘차~ 나무아미~타아~불~ 나무아미~타아~불~~~“

아무리 혼령인들 이런 소리에 어찌 감응 않으랴!
영돈말이 용 대자리 한족 귀퉁이에 작은 글씨가 있어보니 희미하게 [Made in china]라고 적혀있다. 이런 대자리마저도 이제는 수입품이라니.
모든 제식이 끝나고 망자의 옷과 기물을 태우는 시간이다.
피시식 거리며 불기에 시들어지는 두 분 영가의 옷가지들을 태우면서 운 좋게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모든 것들에 감사의 기도를 함께 태워 올렸다. 내년에도 꼭 참석 될 수 있도록  굽어 살피소서!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은 채 우리 셋은 인근의 소문난 초당 순두부집에서 강릉에서의 마지막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원주의 하루가 밝았다.
비는 그쳤다고 하나 하늘은 그대로였다.
휴대전화기의 받데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C형과의 연락이 두절 된 후 겨우 연결이 되었으나 맘이 상해버린 C형은 혼자 대구까지 가 버렸단다.
약간 낭패스럽기도 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내 옆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J사장의 ‘과일봉지 자동 싸기’ 발명에 도움이 될까하여 P를 소개시키기로 하고 대문을 들어섰다.
생각대로 내외는 반갑게 맞아주었고 이왕 한 걸음이니 이효석 님의 메밀꽃 축제를 보고 가란다.
하기야 몇 번을 벼르던 박경리 선생님을 뵙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시간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신세란 늘 헛 타령만 부르게 하는가보다.
어디 이효석님 뿐이랴!
춘천의 김유정, 인제의 박수근도 강원도라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아닌가.

‘소금을 뿌린 듯’을 되뇌는 J사장의 시선 속에서 서구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보헤미안같은 이상향의 사나이, 섬세한 감각의 예술가, 문학과 예술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 시대와 무관했던 탐미주의자,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만 커다란 선생의 가녀린 얼굴이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다.    
봉평 장터와 노루목을 오르내리며 그토록 우악스런 산세에서도 깔끔한 외모와 온화한 성격을 두루 갖춘 다재다능했던 사람.
언젠가는 장터로 물레방앗간으로 허생원과 동이와 조선달을 동무삼아 선생님의 자취를 더듬을 때 그 때는 제발 허물일랑 말아 주소서!
하늘에선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할 길.
이제는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물러나야 한다.
원주는 원주에 두고 강릉은 강릉에 둔 채 혼자 통영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차창엔 비-
원주에서 내리던 비가 중앙고속도로를 지나 경부선으로 들어섰는데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이 비는 원주에서 내리던 비가 아니다.
차안에 미리 켜져 있었던 티브이에서는 “음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부제를 달고 열린 음악회가 한창이다.
몇 번의 꺼짐과 켜짐을 번복하더니 마지막 싱어로 출연한 하춘하의 열정적인 무대가 출연 스크랩터들의 명단과 같이 출렁이고 있다.
“미련 없이 잊을 수 있어~ ”

엄청난 미련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몸부림인양 그녀는 몸을 뒤틀고 있었다.
미련 없이 잊을 수 있어?
“터무니없는 엉터리 수작으로 날 놀리지 마.”
네가 정말 잊을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잊을 수 있어”라고 말하지 못할걸.
잊을 수 없는 네 마음을 숨기지 못하니까 네 의지에게 호소하는 거잖아.
그것도 “잊을 수는 없어” 라는 솔직한 자신의 내면에다 으름장까지 놓으면서 “제발 잊게 해다오!”라고 말이야.
누굴 속이려 해! 지금의 내 맘을 알기나 하는 거야?

한번의 짧은 휴식이 있었으나 커피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차창 밖은 벌써부터 암흑이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그냥 눈을 감고 터덜터덜 버스의 흔들림에 온몸을 맡기고만 있을 뿐.
좌석 벨트를 푸는 움직임과 함께 휘청 휘청 네온들이 어지러운걸 보니 마산인가 보다.

2004년 9월의 여행은 결코 잊지 못하리라!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