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5-03-15 19:03]  



[한겨레] 식물의 기억·감각체제 입증 연구 잇따라 고창효 경상대 연구교수(환경생명과학연구센터)는 풀과 나무에도 기억과 지능이 있다고 믿는 식물학자다. 그는 “물론 동물처럼 뇌와 신경세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식물도 나름의 아이큐를 지닌다”고 늘 말하고 다닌다.
그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5년째 식물의 기억과 조건반사에 관한 실험을 벌여왔다. 식물학 분야의 저명 학술지 <플랜트 저널>에는 식물의 ‘메모리(기억) 체제’를 입증하는 첫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네트워크·전기신호등 형태로
반복학습에 ‘조건반사’ 현상
빛 식별하고 건드리면 반응
‘기억 저장고’ 찾기 과제남아 “식물도 조건반사를 합니다. ‘파블로프의 개’한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들려주는 반복 학습을 한 뒤엔 개가 종소리만 듣고도 군침을 흘리는 것처럼 식물도 반응한다는 거죠.” 그는 애기장대라는 실험식물을 대상으로 먹이와 종 대신에 빛과 식물호르몬(화학물질 ABA)을 이용해 조건반사 실험을 벌였다. 빛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은 빛을 좋아한다. 그래서 특정 파장(파랑)의 빛을 받으면 이산화탄소와 산소가 드나들도록 잎·줄기의 ‘기공’(공기구멍)을 활짝 연다. 반면에 저온·가뭄이나 어떤 화학물질 스트레스가 닥치면 몸 안의 물기를 지키려고 기공을 닫아버린다.

고 박사는 빛과 식물호르몬의 자극량을 적당히 만든 뒤에 애기장대한테 두 자극을 함께 주는 서너차례의 ‘학습’을 2시간씩 반복했다. 그랬더니 학습된 애기장대는 화학 스트레스 없이 빛만 쪼여도 기공을 닫아버렸다. ‘학습의 영향’은 유전자 수준에서도 확인됐다. 그는 “화학물질의 자극 때에만 생기는 여러 유전자·단백질들(rd22 등)이 화학물질 아닌 빛만의 자극에도 반응해 고스란이 생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빛이 화학물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건반사”라고 풀이했다.

그렇다면 식물도 ‘경험’을 기억하는가? 고 박사는 “생물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려면 당연히 ‘경험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며 “식물도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기억의 체제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최근엔 ‘추위’의 자극 경험이 식물에 비슷한 기억 체제를 가동하는지를 연구 중인 고 박사는 “식물은 뇌처럼 특정한 기억의 ‘공간’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세포 자체에 기억의 ‘기능’은 존재한다”며 “마찬가지로 지능의 기능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억 뿐 아니라 식물이 매우 정교한 감각 체제를 지니고 있다는 가설도 최근 생체분자 수준의 실험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난달 포항공대 남홍길 교수와 유종상 박사 연구팀은 광합성 작용을 위해 식물이 빛을 인지하고 흡수할 빛의 양을 어떻게 조절하는지의 메커니즘을 처음 밝혀 저명 학술지 <셀>에 발표했다. 빛이 많으면 작아지고 적으면 커지는 ‘눈동자 조리개’의 기능이 식물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 연구팀은 특정 유전자(‘PAPP-5’)가 빛을 처음 인지하는 색소단백질 ‘피토크롬’을 조절해 식물이 수용하는 빛의 최적량을 능동적으로 조절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 박사는 “식물은 가시광선에 섞인 빨강·파랑 파장의 빛과 자외선을 따로 인식해 각기 다른 반응을 할줄 안다”며 “동물의 눈동자와 다르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빛의 정보를 최대로 활용하는 감각 체제가 발달해 있다”고 말했다.

촉각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이수민 세종대 식물발달유전학연구실 박사는 건드리면 잎을 접는 식물 ‘미모사’ 뿐 아니라 일반 식물체에서 잎과 줄기에 상처가 나면 어떤 반응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를 벌였다.



그의 연구에서 식물은 상처를 입으면 방어체제를 가동해 몸 속 지방물질을 분해해 여러 지질산물을 만드는데, 이런 반응은 상처 부위만이 아니라 식물 곳곳으로 퍼져 동일한 반응이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박사는 “이는 식물이 감각한 것을 마치 동물의 신경조직이 하듯이 몸 전체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식물의 감각은 동물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체제로 진화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또한 사람의 동물 중심적 이해로는 밝혀진 것보다는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훨씬 더 많다. 유종상 박사는 “감각세포가 따로 없는 식물에서 감각은 단백질 등 생체물질의 생화학 반응 네트워크나 이온물질의 전기신호 등 형태로 이뤄지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고창효 박사는 “그런 네트워크나 전기신호가 ‘어디에’ ‘어떻게’ 기억돼 있다가 나타나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파릇한 새싹이 살짝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봄철에 식물의 감각과 기억을 연구하는 식물학자들은 풀과 나무의 ‘봄 합창’을 다른 눈과 귀로 듣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