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전철을 타게 되었지요.
플랫폼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전철 안에서 읽을 거리를 백 속에 넣어오지 못한 것을 알고
급히 구내매점에서 작은 잡지 한권을 샀지요.
얇아서 부담이 없어보이는 [좋은 생각]이란 책이었어요.
차 속에 앉아 있는 약 한 시간 가량을 저는 아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답니다.
얇은 책 속에 마음을 맑게 해주는 좋은 글들을 여러 편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집으로 돌아와 [좋은 생각]홈을 찾아봤더니
함께 하고 싶은 좋은 님들께 추천하라는 글들이 목록에 있더군요.
그래서 '잘됐구나'  하고 앞으로 좋은 글 있으면 마음 놓고 퍼다가  
우리 자연음악 식구들과 함께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래 글은 월간 [좋은 생각 2003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눈 오던 날

진눈깨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11월, 연극 연습시간에 늦은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차를 몰았다. 그 진눈깨비가 그해 첫눈이었지만 내겐 너무나 야속했고 짜증스럽기만 했다. 날씨 탓에 길이 막혀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고, 교통지옥을 향해 퍼붓던 나의 저주는 지친 일상에 대한 회의에 이르렀다.

연습실에 거의 다다랐을 때 더 빨리 가려는 욕심에 골목으로 들어섰다. 순간 차 뒷바퀴가 ‘쿵’하고 떨어지더니 제자리에서 헛도는 것이 아닌가! 공사하느라 파 놓은 구덩이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난 눈을 맞으며 속수무책으로 서 있었다. 안전 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은 누군가를 비난하며….

그때 누군가 다가왔다. “차가 빠졌어요?” 안경 쓴 남자가 연인인 듯한 아가씨와 함께 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제가 한번 해볼까요?” 남자는 능숙한 솜씨로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돌이며 나무토막들을 주워 와서는 바퀴에 괴기 시작했다. 흙과 눈으로 엉망이 된 손은 빨갛게 얼었고 조용히 서 있던 아가씨도 종이 상자를 집어와 그를 도왔다. 그러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쳐 서 있는 우리 세 사람 뒤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한번 해봅시다!” 돌아보니 야채장사 아저씨가 견인할 때 쓰는 줄을 자기 트럭에 묶어서 당겨 보자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우릴 안심시킨 뒤 굉장한 소음을 일으키며 내 차를 끌어내려 애썼지만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망연자실 서 있는 우리 네 사람 곁에 이번에는 경찰차가 멈추어 섰다. 젊은 경찰 세 명이 우르르 내렸고 모두 힘을 합해 차를 밀었으나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도저가 등장했다. 불도저 아저씨는 “전부 비켜요!”라고 소리치더니 너무도 간단히 차 뒷부분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위기의 순간 사람들을 돕고 유유히 사라지는 슈퍼맨처럼 한마디 말도 없이 공사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어 정신을 차려 보니 경찰차는 이미 떠났고, 야채장사 아저씨는 어느새 트럭으로 돌아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치자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젓고는 차를 돌렸다. 그리고 고마운 연인들은 어느새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눈은 여전히 내렸고 교통 체증도 여전했고 연극 연습에는 어처구니없이 늦어 버렸다. 그런데도 마냥 좋았다. 선물을 잔뜩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으로부터….

이항나 님(연극인)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