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연스럽게 노래의 날개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하세요♡ - 대지의 천사 -
낭패(狼狽)
                               강  재  일
9월 9일.
백로를 엊그제 보낸 비 날 진 초가을날씨는 괜스레 을씨년스럽다.
아침부터 기분 좋은 일보다는 언짢은 사건이 더 많았던 터라 가급적이면 외출을 줄이고 내근을 할 요량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사람을 상대 한다는 것이 힘들어 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뱉은 말 한마디가 화근이 되어 화살로 되돌아오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았던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루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려워져 가는 사회생활의 혼란스러움을 몸으로 받아들이자니 자연적으로 스트레스가 쌓여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에 왜 내가 희생 되어야 하는가 하는 불만스런 맘은 숨길 수가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들을 하고 사는가 보다.
유난히 그런 걸 못 참아 하는 까탈스런 내 성격이 더 문제일 뿐.

살기가 힘들긴 힘드나 보다.
어렵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조차 우선의 생활이 힘들다보니 예전의 어려웠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현실에 대한 짜증만 밖으로 내 돌린다.
내 기분이 엉망인데 네 기분 쯤 내 알바 있느냐다.
이름 하여 막가 파!
실파, 대파, 양파는 들어 봤어도 막가 파는 어쩐지 귀에 설다.
이런 세상살이가 싫어 벗어나 살고자 하나 목구멍이 포도청 아닌가.

부대끼며 사는 것.
분명 이것이 인간의 삶일진대 부대끼는 것도 한계가 있을 성 싶다.
오늘 아침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남녀간의 시달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갈등?
칡 순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들 그게 무슨 문제겠나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았다.
암튼 여자란 이유 때문에 동료남자직원들로부터 묘한 프로포즈를 받는단다.
그것도 말로만 아닌 몸으로 말이다.
더위가 가신지 오랜데 아직도 제정신들이 아닌 모양이다.
피서(避暑) 보낸 정신들도 이제는 제자리로 불러들일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면 남들은 막가는데 난들 못 가겠느냐 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다.
그런 내용을 유선으로 상담 한다는 건 서로간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찢어졌다.

딱히 정해놓고 바쁠 건 없지만 그래도 밥값은 해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일거리를 찾던 중 낯선 사내의 얼굴이 책상너머로 슬몃 스쳤다.
머리를 많이 흔드는 품새로 보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자 같다.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직원들의 책상머리를 기웃대지만 응대하는 사람이 없자 난색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내게로 바삐 온다.
출입구 쪽으로부터 내가 앉은 자리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얼른 보기에 사무용품을 담은 상품 셑트 위로 송글 송글 땀 맺힌 이마가 훤하다.
크게 소용될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한 나머지 다리가 불편한 양반이 저렇게 무거운 가방을 메고 발품을 파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냈다.
“우리 사무실에 필요한 물건은 없는 거 같군요. 어렵게 오셨는데 음료수라도 한잔 사 드세요.“

“.......................???????????????.
나도 돈 있어요. 왜 이러세요?”

“미안 합니다. 다만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냥 제 성의로.....”
그러면서 그의 구겨진 바지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려는 순간.
결국 난 나머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너무도 당찬 그 사람의 나무람이 나로 하여금 오금을 꺾어버린 버린 것이다.
실쭉한 눈빛 아래로 오뉴월 햇살보다 더 강렬한 무엇이 사무실 분위기를 포항제철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달궈 놓으면서.

차츰 차츰  식어오는 의식 속으로 조심스럽게 분명한 외침하나가 메아리친다.
그러나 그건 메아리가 아니었다. 뇌성이었고 벽력이었고 천지개벽이었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장애자의 단순한 분노일거란 내 생각은 누더기처럼 찢어졌고 약삭빠른  동정에 익숙해져서 아무것이나 더 가지려 하는 못난 인간성을 성토하는 처절한 매질이었다.
국민들의 공복노릇 한답시고 마른자리에서 책상머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얼빠진 자 들의 알량한 선심쯤은 똥통 속에 빠져 뒹구는 구더기 같다는 항변이었다.

갑자기 철퇴를 맞은 느낌이다.
아니 그런 느낌마저도 내가 제정신을 찾은 후였다.
누구하나 나누는데 익숙한 적이 있었던가. 특히나 공무원 조직에서 말이다.
내가 아니면 남의 것이다. 그 남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니 즉, 우리가 아닌가.
입으론 “우리”를 외치면서 왜 꼭 “나”여야만 했는가.
어렵고 힘들면 “우리”것이고, 좋고 바른 것은 “나” 의 것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사고(思考)다.
그런 사고(思考:생각하고 궁리함)는 반드시 사고(事故: 일의 그르침)를 치므로 필히 사고(思顧:돌이켜 생각함)해야 할 것이라.

명분 없는 도움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그 당당함.
그러나 그런 당당한 장애우의 사타구니 밑으로 흘러내리는 오줌발 보다 못한 연줄 하나 만들 욕심으로 사과 상자나 라면상자도 모자라 굴비상자까지 동원해서 “갖다 바치기”를 하는 사지 멀쩡한 가진 자들을 보라.
그러더니 요즘은 만 기천 원짜리 선물박스 때문에 검찰 수사를 한다고 난리 부루스다. 정작 맑히고 밝혀야 할 난제들이 수두룩한데도 말이다
서로 간에 주고받는 정담도 정담이거니와 비누조각 몇 개 담아서 지인들한테 나눠준 게 죄가 된다면 세상 미물도 웃을 일 아닌가.

사람이란 정을 나눔으로 금수(禽獸)와 구별된다.
여기서의 정이란 동물적인 본능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어진 후천적인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웃끼리 푸나물 한 움큼 쌀 한 됫박 나눠 먹을 줄 아는 인정 말이다.
그런 인정이 정으로 통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위정자들은 아직도 무논의 개구리 꼴이다.

난 가끔 직원들의 회식자리에서 술잔에 술을 따를 때 반만 따른다.
시절유행으로 절주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이유겠지만 술잔을 넘치게 따른다는 게 스스로 거슬렸기 때문이다.
꼭 넘쳐야 맛이라는 사람에게야 당해낼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비어있는 잔속엔 내 정을 담았어요!” 라는 어설픈 코멘트를 허물없이 받으면서 오히려 좋아 하는 분이 더 많더라는 거다.
가진 게 없는 내 처지에서 나눠주고픈 한량없는 마음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내겐 넘치는 게 있다.
情! 쓸 만큼  쓰고도 남아있는 정 말이다.

무안을 당한 황당한 내 모습을 내 스스로 보기까지엔 상당한 시간이 흘렀나보다.
점심 먹으러 가자는 직원의 재촉에도 그 당당했던 사나이의 뒷모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은 걸 보면.


*옛날에는 음력 9월 9일을 중구절이라 하여 국화전과 국화주뿐 아니라 유자를 잘게 썰어 잣과 함께 꿀에 저민 화채랑 도랑새우로 담근 토하젓 등을 장만하여 교외로 단풍놀이를 하면서 시와 가무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음

(그런데 오늘은 양력 9월 9일 중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