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인간의 지식을 부자연인 것으로 보고 무지를 존중한다. 있는 그대로인 자연의 진리는 하나이고 전체적인 것인데, 지식은 이것을 둘로 쪼개고 상대라는 차별을 만든다. 우와 좌, 차와 피, 선과 악, 미와 추 등등 무한의 대립이 생겨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지식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전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말이므로, 말과 지식은 완전히 같은 죄를 걸머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진리를 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인 진리는 무엇에 의해 포착할 수가 있는가.

단 한 가지 체험적인 직관에 의할 수밖에 없다. 직관은 있는 그대로인 것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이 직관은 본인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타인에게 전하는 일은 극히 곤란하다. 만일 타인에게 굳이 전하려 한다면 말에 의할 수 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노자는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쉬운데, 천하는 이를 잘 모르고 잘 행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은 노자뿐 아니라 독자도 이것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이와 같은 말의 한계에 관한 반성은 , 노자에선 주장으로서 다루어져 있지 않으며, "장자"에 이르러 명백해진다.

희노애락이 있고, 근심과 한탄 변덕과 고집이 있고, 요사스러움과 자유분방, 노골과 꾸밈과 같은 온갖 인정의 변화가 있다. 음악의 소리가 비어 있는 곳에서 나오고 습함이 곰팡이를 이루게 하듯이 인간의 감정변화는 밤낮으로 앞서의 것과 서로 바퀴어 그 싹트는 바를 모른다.

아침 저녁 이같은 변화가 생기는 것은 그 연유하는 바가 있어서일까. 그것이 아니면 내가 없고, 내가 아니면 희노애락을 취할 데가 없다. 그렇다면 감정과 나 자신은 서로 가깝다 하리라. 하지만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지를 모른다.

진재가 있는 듯하지만 그 자리를 볼 수 없다. 그 행하는 바는 믿을 수 있지만 그 모양을 보지는 못한다. 실체는 있지만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인체 중에는 백 개의 뼈마디,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내장이 있다. 나는 어느 것과 더불어 친해야만 할까. 그대는 이것을 모두 좋아할 것인가.

아무래도 그 가운데의 어느 하나를 좋아하는 사사로움이 있게 되리라. 만일 그렇다면 모두를 한결같이 종으로 여기란 말인가. 모두가 종이라면 서로 다스릴 수가 없지 않을까. 아니면 번갈아가며 주인이 되고 신하라도 된다는 것일까. 사실인즉 참된 주인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는, 그 참됨을 이롭게 하지도 손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물이 있어 혼성하여,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소리도 없이 괴괴했고, 눈에 보이는 모습도 없이 다만 혼자 있을 뿐으로서 그 존재를 바꾸는 일도 없다.

우주에 이르는 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러면서도 지칠 줄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만물의 어머니이기에 알맞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좋을지 나는 모른다. 임시로 이름을 붙여 도라 하고, 굳이 이름지어 '대'라고 불러보자.

'대'라면 고루 미칠 것이고, 고루 미치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시 이곳에 돌아온다. 이와 같이 도는 큰 것이긴 하지만 대라고 하면 하늘도 대이고 땅도 대이고 왕 또한 대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 것이다.

무슨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지만,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도란 곧 무한자를 가리킨다. 우리들의 상식인 말이나 개념은 한계가 있는 유한을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무한이라는 것은 개나 말 등등 유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념으로서 가질 수는 없다. 우리들은 무한이란 말을 입에 올리고 자못 아는 체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한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계"라는 개념이 "없다"느 것이고 사실은 개념적 사고의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무한히 큰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먼 곳에 있는 것이라도 나의 속에 받아들인다. 아니, 멀다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멀고 가까움이라는 건 유한자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고 무한자로선 곳곳이 나인만큼 멀리 가는 게 아니고 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한히 큰 도에 가까운 것이라 하면 천지를 들 수가 있으리라.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도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잊어선 안 될 일은, 인간 또한 도를 좆을 때 도나 천지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크기를 가질 수 있다느 점이다. 이리하여 도, 하늘, 사람과 같은 서열을 생각할 수 있으리라. 이리하여 도는"한정이 없는 것"이라는 부정적, 소극적인 규정에 의해 포착할 수밖에 없지만 단 한 가지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그것은 도의 홛동이 "자연"이라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 활동은 그 것 자신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의식이나 노력 같은 것이고, 의식이나 노력 같은 것은 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번 그 이루어진 형체를 받게 되면 이를 손상시키지 않고 생명이 다하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형체가 사물과 서로 거스르거나 서로 마찰하면 그 생명의 다함이 달리는 말과 같아 이를 능히 막지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비록 죽지 않았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 형체가 바뀌면 그 마음도 또한 이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큰 슬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보편 존재로서의 도는 희미하고 어렴풋하다. 포착할 수 없는 그 밑바닥에 물상이 숨어 있다. 속속들이 탐지할 수 없는 그 밑바닥에 에네르기가 숨어 있다. 그 에네르기는 불멸이다. 거기엔 확고한 법칙이 있다. 태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도는 끊기는 일 없이 존재했고 만물을 통괄하고 있다.

나는 무엇에 의거하여 만물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만물의 근본인 도에 의거해서이다. 이것이 곧 도에 대한 노자의 체험적 직관이었다. 무한자 속에 들어가면 흡사 짙은 구름에 싸인 것처럼 앞뒤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인 혼돈을 바라보는 느낌이 다르리라.

그러나 이 혼돈 속에 "영묘한 무엇"인가가 있고, 부정하기 어려운 진실성과 확실성을 가진 것이 있다고 함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는 일없이 하지 않음은 없다" 하는 도의 활동일 것이다.

스스로는 하고자 하는 의사를 갖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물상을 태어나게 하고 다시 또 돌아오는 물상을 받아들인다. 이 무한의 생산력과 포용력이야말로 무한자인 도의 속성이리라. 그렇기는 하지만 노자는 왜 이와 같은 상징시와도 비슷한 표현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되풀이해서 말하면 무한한 것은 상식인 유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이라는 매게물을 초월한 직접적인 체험적 직관의 길이 선택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신비적 직관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입에 올릴 때 우선 필요한 일은, 이 말에 따라다니고 있는 혼란을 제거시켜 두는 일이다.

상식으로 신비적이라 할 경우에는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초능력이나 마법 따위까지 포괄하며, 혹은 주술적인 비밀의식 등도 포함한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에서 신비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초능력이나 비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통의 능력을 가지 인간이라면 되고, 또한 일상적으로 비단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지식의 상대성과 한계를 알고, 무한자를 직접적으로 감득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기르는 일이 조건이 되는 데 불과하다. 물은 H와 O로 분해하는 대신 "물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것도 신비적 체험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으리라. 이와 같이 하여 도는 무한자의 별명이 된다. 그런데 노자는 이 무한자인 도를 "하나"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노자의 실천철학은 무지무욕,무도덕과 같이 모두 부정적 입장에서 구축되고 있다. 그와 같은 전면적인 부정의 극점에 나타나는 것이 "무"이다. "학문을 하면 날로 이익되고, 도를본받으면 날로 손해본다. 이것을 손해보고 또 손해보며 무위에 이른다. 무위로써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제 48장)

보통 학문을 한다 하는 것은 지식을 날로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도를 닦는다느 것은, 그 것과는 거꾸로 이것을 줄여나가는 일이다. 줄이고 또 줄여서 마침내는 무위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만능의 활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선 "무위"라고 하고 "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그 차별의 지혜를 버리고 온전한 무위의 경지에 들어갔을 때, 그 경지는 대로 "무" 그것이다. 왜냐하면 지식, 욕망, 도덕 등 인위를 죄다 버리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공허가 되고 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뜨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까 걸리는 게 없다고 말하자.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으니까 적적하다고 말하자. 이것으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므로 미소라고 하자. 이 세 가지의 표현만으로는 아직도 그 정체를 구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표현을 뒤섞어 하나로 하면 그것에 가까운 것이 되리라. 그것은 윗쪽이라 하여 밝은 것도 아니고, 아래쪽이라 하여 어두운 것도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모습없는 모습이고 물 아니 상이다. 바꾸어 말하면 황홀이고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보아도 그 얼굴을 볼 수가 없고, 이것을 뒤로부터 보아도 그 고리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태고로부터 전해진 이 도를 단단히 손에 움켜잡고 지금 있는 것을 통괄한다면 만물의 시작인 모습을 알고 이것을 재현할 수도 있게 되리라. 이것을 도에 의한 지배라고 부른다.

이것은 '무'인 도의 체험적 직관의 서술이다. 그것은 논리의 매게를 빌지 않는 직접 체험이라는 의미로서, 신비적이라 할 수가 있으리라. 무의 모습이 마치 환영처럼 그려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는 이와 같은 환상의 모습으로밖에 포착되지 않는다. 왜냐면 말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유이고 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말이라 하는 것은 입에서 뿜어내는 한낱 소리가 아니다. 말을 입에서 내는 것은 무엇인가 주장하려 하는 데 있다. 다만 그 주장하려는 내용이 사람에 따라 다르고 일정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만일 말의 내용이 일정하지 않은 채로 발언되었다면,

그 말한 것이 과연 말한것이 되는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 되는지 알 수 없을 게 아닌가. 이를데면 자기로선 "새끼새"의 지저귐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어도 그것과의 구별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진리여야 할 도는 무엇에 가려져 참과 거짓의 구별하게 하는 것일까.

말은 무엇에 가려저 시,비의 대립을 낳는 것일까. 애당초 도라는 것은 어디까지 가더라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고, 말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어도 타당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다름이 아니라 도는 (상대를 이기려 하는) 작은 성공을 구하는 마음에 의래 가려지고, 말은 영광이나 화려함을 구하는 언변 속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상대의 잘못이라 하는 것을 옳다고 하든가, 상대의 옳다 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든가 하게 된다. 만일 정말로 상대가 잘못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상대가 옳다 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시비의 대립을 초월한 "명백한 지혜"로써 비추는 게 첫째이다.

무란 아무것도 없는 공허인 상테이므로 거기서는 아무런 활동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그것에 들어가는 세계라 하는 것은 그래도 알 만하지만, 이것을 "만물의 어머니"라 부르고 온갖 존재를 낳는 근원이라 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안고 충기는 이로써 화를 이룬다."(제 42장)
전자의 "유에서 생기다"의 유는 후자의 하나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와 도는 거의 같은 것이지만, 도는 곧 무인 데 비하여 '하나'는 유에의 출발 준비태세를 갖춘 것이라고 하겠다. 그 바로 뒤에 음양이나 충기라는 말이 나타나므로 , 그 하나란 음양으로 이분되기 이전의 하나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기'는 가스 형태의 미립자이고 천지 사이에 충만되고 있으며 천지만물을 구성하는 원자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가스 형태의 것이라서 무정형이고 그 점에선 무에 가깝고, 또한 미립자라고는 하나 크기를 갖는 것이므로 그 점에선 유가 가깝다. 이를테면 기는 무와 유의 중간인 성질에 가까운 것이다. 노자는 이와 같은 중국의 오랜 우주생선론을 전제로 하여 무에서 유가 태어난다고 하는 설을 구성했다고 하겠다.

장자도 노자와 공통되는 바탕을 갖는다. 도는 양자에 공통되는 것이고 "무위자연"을 근본의 입장으로 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무엇을 도로 규정하고 무엇을 무위자연으로 하느냐 하는 점에선 양자의 사이에 미묘한 상위가 있고, 그 상위는 차츰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장자가 먼저 문제삼았던 것은, 있는 그래로인 진리는 어떻게 얻어지는냐 하는 인식론이다. 있는 그대로란 인위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자연이고, 바꾸어 말한다면 무위자연이 된다. 왜 이와 같은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추구하느냐 하면, 장자로선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아는 일이 곳바로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있는 그래로인 진리 추구법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상식의 진리 추구 방법이 잘못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상식의 진리 포착이 어떤 점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노자도 말했지만 인간의 말이 갖는 불완전성, 따라서 상식적 사고법의 결함이 그 원인인 것이다.

우리들은 사물을 "안다"고 한다. 안다고 하는 말은 "나눈다"는 것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인간은 혼돈상태인 하나인 것을 그대로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반드시 이것을 둘로 나눔으로써 "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판단이란 하나의 것을 반쪽으로 나누는 것이고, 이해란 도리를 좇아 분해하는 것이다. 분석 역시 나누고 쪼갠다는 뜻이다.

이렇듯 애당초 하나인 것을 둘로 분해시키는 게 인간의 사고법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해하는 인위를 가하는 일은, 있는 그대로인 진리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인위에 의해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상식으로선 하나의 공간을 이곳과 저곳, 앞과 뒤, 우와 좌라는 식으로 분리한다.

그리하여 이곳고 저곳이라는 장소의 구별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일까? 이곳이란 자기라는 인간이 현재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 저곳이란 자기가 없는 장소를 가리킨다. 만일 내가 지금있는 장소에서 이동했다고 하면, 지금까지 이곳이었던 곳이 저곳이 되고, 저곳이었던 곳이 이곳이 되어버린다.

즉, 이곳 저곳이라는 구별은 나의 신체에 대해서만 있는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간의 신체를 떠난 절대적 공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거기엔 이곳 저곳은 물론이고 앞뒤나 좌우라는 차별도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즉, 인간은 자기를 중심을 하여 멋대로 전후 좌우와 같은 차별을 만들어 낸다. 만일 그러한 인위를 버리면, 있는 그래로인 공간에 차별은 없고 다만 하나임을 알게 되리라.


PS,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일체유심처" 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실상은 마음따라 투영되기에..

이 글은 기냥 옮겨 적었을 뿐이다. 나와 인류의 앞길에 '수미산'보다 크나큰 태산이면서, 그 무엇도 아닌 환상이 가로막고 있는지 모른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놓아버리기 어려운.. 바로 나라는 분리의식과 삶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이치가 무엇인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니, 구름한점 없이 '청명'할 뿐이다.

지극한 조화(무극)가 지극한 혼돈(무위자연)이라니..

물론, 유한한 의식으로서의 혼돈이 아니라, "불생불멸"한 무한을 말함인데, 과연 무엇을 비추어 추론하겠는가. 오직 모를뿐이다.




Jia Peng Fang - Deep 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