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은 장지오노 의 소설인데, 프레데릭 백이 수작업으로 5년여에 걸쳐 애니메이션으로 재 창조한 작품입니다. 프레데릭 백은 이 작업 중 쪽 눈을 실명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아이들에게 비디오(30분)  보여주었었는데 참으로 받은 바 감동이 컸답니다. 아름다운 수채화풍의 그림도 좋았지만 주인공 부피에 노인의 삶의 태도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하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아침님께서 게시판 목록에 [호흡]에 관해 올리신 글을 읽다가 문득 이 작품을 여러분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어졌답니다. 물론 너무나 유명한 작품임으로 거의 모든 분들이 이미 읽으셨겠지만 이 푸르른 5월에 다시 한번 이 작품 속의 부피에 노인을  상기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주제넘게스리  본문을 여기에 올려봅니다. (그리 길지 않아서 한 5분에서 7분이면 다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지은이: 장 지오노 :
1895년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소도시 마노스끄에서 태어난 지오노는 1929년 소설 『언덕』을 발표한 이래 자연상태의 생활 속에서 대지와 인간의 합일을 꿈꾸는 소설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1970년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신의 3부작'외에 『세계의 노래』,『지붕 위의 기병』,『광적인 행복』『앙젤로』등 30여 작품을 남겼다.


[본문]

1.  한 인간이 참으로 보기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한 잊을 수 없는 인격과 마주하는 셈이 된다.

약 40여 년 전이었다. 나는 여행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는 않은 고원지대를 오래오래 걸어서 올라다니곤 했다. 그 고지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은 알프스 산맥 위의 아주 오랜 고장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동남쪽과 남쪽으로는 뒤랑스 강의 중류를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드롬 강의 원천으로부터 디에까지 이르는 강의 상류를 끝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꽁따 브네쌩 평원과 방뚜산의 지맥이 그 끝이었다. 그곳은 바스(낮은) 알프스 지방의 북부 전부와 드롬 강의 남쪽 및 보끌뤼즈 지방의 일부 작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고도 1200∼1300미터의 인적없고 단조로운 곳에서 긴 산책에 나섰는데, 이곳은 야생 라벤더외에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나는 폭이 가장 넓은 곳으로 이 지역을 가로질러 걸었다. 사흘을 걸은 뒤 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폐한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뼈대만 남은 버려진 마을 옆에서 야영했다. 전날 마실 물이 바닥났기 때문에 나는 물을 찾아야만 했다. 폐허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낡은 말벌통처럼 촘촘하게 붙어 있는 집들을 보니 옛날엔 이곳에 샘이나 우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지붕이 없어져버리고 비바람에 사그러진 대여섯 채의 집들, 종탑이 무너져버린 작은 교회는 마치 사람들이 사는 마을 속의 집이나 교회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날은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유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러나 하늘 높이 솟아있는 이 고지 위에 따가운 햇살을 피할 곳 없는 땅 위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난폭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뼈대만 남은 집들 속으로 불어닥치는 바람 소리는 마치 식사를 방해받은 야수가 부르짖는 소리 같았다. 나는 캠프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섯 시간이나 더 걸어 보았어도 여전히 물을 찾을 수 없었고, 또 물을 찾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똑같이 모두 메말라 있었고 거친 풀들만 자라고 있었다.

  [만남]

  그런데 저멀리에서 검은 작은 그림자가 서 있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실루엣을 홀로 서 있는 나무의 둥치로 착각했다. 어쨌든 나는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그것은 한 양치기 목자였다. 그의 곁에, 불타는 듯한 뜨거운 땅 위에는 30여 마리의 양들이 누워 쉬고 있었다.

  그는 물병을 꺼내 내게 물을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고원의 우묵한 곳에 있는 양의 우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간단한 도르래를 설치해 놓고 깊은 천연의 우물에서 아주 좋은 물을 긷고 있었다. 그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 있고 확신 속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이런 곳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오두막이 아니라 돌로 만든 제대로 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그가 이곳에 왔을 때 발견한 폐가를 어떻게 혼자 힘으로 수리해 놓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었다. 지붕은 튼튼했고 물새는 곳도 없었다. 바람이 지붕을 두드려 기와 위에서 내는 소리가 마치 바닷가의 파도소리 같았다.

  살림살이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릇은 깨끗하게 씻겨 있었고 마루는 잘 닦여 있었으며, 총은 반질반질했다. 불 위에는 수프가 끓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역시 산뜻하게 면도한 얼굴을 하고 있고, 옷에 단추가 단단히 달려 있으며, 기운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옷이 세심하게 수선돼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 식사 후 담배쌈지를 권하자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개 또한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거칠지 않고 상냥했다.

  내가 여기서 그날 밤을 묵어야 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도 하루 하고 반 이상을 더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마을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곳 고지대의 기슭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너댓 개의 촌락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는데, 그 마을들은 차가 다니는 길의 맨 끝에, 떡갈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엔 숯을 만드는 나무꾼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여름에도 겨울만큼이나 날씨가 혹독한 곳에 촘촘하게 모여 살면서 모든 가정들은 닫힌 세계 속에서의 이기심만을 키워 가고 있었다. 분별없는 야심은 이곳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정상을 벗어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남자들은 트럭으로 시내에 숯을 운반하러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아무리 굳센 품성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곤 했다. 여인들은 또한 가지가지 원한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놓고 경쟁했다. 숯을 파는 것을 놓고, 교회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미덕들을 놓고, 악덕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엉클어진 것들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게다가 바람 또한 쉬지 않고 신경을 자극했다. 그래서 자살이, 그리고 거의 언제나 죽음으로 몰고가는 정신병들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 목자는 조그만 자루를 찾아 들고 와서 도토리 한 무더기를 테이블 위에 쏟아 놓았다. 그는 그 도토리 하나하나를 아주 주의깊게 조사하기 시작하더니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따로 구별했다. 나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자기가 해야할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이 일에 기울이는 정성을 보고 나는 더 고집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아주 굵은 도토리 한 무더기를 모으더니 그것들을 열 개씩 세어 묶음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것이거나 조금이라도 금이 간 것들을 제쳐놓았다. 더 자세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완벽한 상태의 도토리가 백 개 모아졌을 때 그는 일을 멈추었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평화가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종일 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다는 인상을 나는 받았다. 그 휴식이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호기심을 느꼈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그는 양떼를 꺼내어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 떠나기 전에 그는 세심하게 골라 개수를 세어 모은 도토리 자루를 물양동이에 담갔다.

  나는 그가 지팡이 대신 대략 길이가 1.5미터 정도 되고 엄지 손가락만큼 굵은 쇠막대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산책하며 쉬며 그가 간 길을 나란히 따라갔다. 양들의 목장은 작은 골짜기 아래에 있었다. 그는 작은 양떼를 개가 돌보도록 맡기고는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올라왔다. 나의 무례함을 꾸짖으러 오는 것 같아 두려웠으나 전혀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가는 길이었다. 그는 내게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청했다. 그는 거기서 산등성이를 향해 200미터를 더 올라갔다.

  그가 가려고 한 곳에 이르자 그는 땅에 쇠막대기를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구멍을 만들어 그 안에 도토리를 넣고 다시 구멍을 덮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땅인지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백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 그는 다시 도토리 고르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주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를 끈질기게 물어보았다고 생각한다. 3년 전부터 그는 이런 식으로 고독하게 나무를 심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십만 그루의 도토리를 심었다. 십만 개의 씨에서 2만 그루의 싹이 나왔다. 그러나 산짐승들이 나무를 갉아먹거나 예측할 수 없는 신의 섭리에 속한 일들이 일어날 경우, 이 2만 그루 가운데 또 절반 가량이 죽어버릴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렇게 되면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나이가 궁금했다. 그는 분명히 50세가 넘어 보였다. 55세라고 했다.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다. 지난 날 그는 평지에 농장 하나를 갖고 있었고 그곳에서 인생을 가꾸며 살았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고 뒤이어 아내를 잃었다. 그후 그는 고독 속에 물러앉아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 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달리 중요한 일거리도 없었으므로 이런 상태를 개선해 보기로 결심했다고 덧붙였다.

  그 때는 나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고독한 사람들의 영혼에 섬세하게 접근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정확히 말해서 내 젊은 나이는 나 자신과 관련지어서만, 그리고 어떤 행복의 추구만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상상케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삼십년 후면 1만 그루의 떡갈나무가 아주 멋진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일 삼십년 후에도 하느님이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면 그 동안에도 나무를 아주 많이 심을 것이기 때문에 이 1만 그루는 바다 속의 물방울 같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벌써부터 너도밤나무를 번식시키는 것을 연구해오고 있으며 그의 집 근처에 이 나무의 열매에서 길러낸 묘목원을 갖고 있었다. 울타리를 세워 양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잘 보호해 놓은 묘목들, 즉 그의 연구 재료들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는 또한 지면에서 몇 미터 지하에 어느 정도 습기가 고여 있을 것 같은 땅에는 자작나무를 심으리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헤어졌다.

  [해후]

  다음해 1914년에 전쟁(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나는 5년 동안 이 전쟁에 참가했다. 나는 한낱 보병 병사의 몸이었으므로 나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면 그런 일 자체는 나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화제거리라든가 우표수집 같은 것으로 여겼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벗아났을 때 나는 아주 적은 액수의 제대 보너스를 받았으며, 신선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마시고 싶은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았다. 인적없는 그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들었을 때 나에게는 그런 바람 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곳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폐허가 된 마을 너머 멀리에서 무슨 회색빛 안개 같은 것이 카페트처럼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난 여기 오기 전날부터 나무를 심던 그 목자를 다시 생각하기 생각했다. "1만 그루의 떡갈나무라면 꽤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거야."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엘제아르 부피에 역시 죽었으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게다가 20대의 나이에는 50대의 인간들이란 죽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늙은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주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는 생업도 바꾸었다. 양들을 네 마리만 남기고 대신 100여 개의 벌통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나무들을 위협하는 양들을 치워버린 것이다. 그동안 그는 전혀 전쟁 때문에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그는 태연하게 여느때와 다름없이 나무를 계속 심었던 것이다.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들은 그때 10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은 나보다, 그리고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그것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문자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엘제아르 부피에도 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 속에서 그가 키워 놓은 숲을 산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숲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가장 폭이 큰 것은 11킬로미터나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아무런 기술적인 장비도 지니지 못한 한 인간의 손과 영혼에서 나온 것임을 기억할 때마다 나는 인간이란 파괴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하느님처럼 유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는 자기 생각을 꾸준히 실천해 가고 있었다. 내 어깨 높이에 와닿는 너도밤나무들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경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떡갈나무는 빽빽이 자라 있었고, 들짐승에게 갉아먹혀 피해를 입는 나이를 넘어서 있었다. 신 자신이 이 피조물을 파괴하려는 섭리를 갖고 있다면 앞으로는 태풍에게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 감탄할 만큼 잘 가꾸어진 자작나무 숲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그러니까 1915년 내가 베르덩 전투에서 싸우던 시기에 심은 나무들이었다. 밑에 습기가 있으리라고 정확하게 짐작했던 모든 땅에 그는 자작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자작나무들은 젊은이같이 부드러웠고 아주 단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창조란 연달아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일을 고집스럽게 추구할 뿐이었다. 마을로 다시 내려왔을 때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늘 말라붙어 있던 시내에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주 오랜 옛날 어느 때는 이 말라 붙었던 시내에 물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소개했던 쓸쓸한 마을들 가운데 몇몇은 옛 갈로 로망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아직도 그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때 고고학자들이 와서 이 곳을 파헤쳤고, 그들은 여기에서 낚시바늘을 찾아내곤 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약간의 물을 얻기 위해서도 저수통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바람도 몇가지 씨앗들을 흩어 놓았다. 그래서 물이 다시 나타나자 그와 함께 버드나무가, 골풀이, 풀밭이, 정원이, 꽃들이, 그리고 삶의 이유 같은 것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일어났기 때문에 습관처럼 익숙해져서 아무런 놀라움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산토끼나 멧돼지들을 잡으려고 외롭게 산을 타는 사냥꾼들은 작은 나무들이 많이 번식하고 있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으나 그것은 그저 땅이 자연스럽게 부리는 변덕 탓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사람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의심을 두었다면 그들은 그에게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의심을 느끼게 할 만한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훌륭하고 고결한 그의 인격 속에 이처럼 끈질긴 고집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과 관리들 가운데 누가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1920년 이래 나는 1년에 한 번씩은 엘제아를 부피에를 방문했다. 그동안 그가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는 것을 나는 전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 자신은 그를 그런 어려움 속으로 종종 밀어 넣었던 것을 아실 것이다. 나는 그가 겪었을 곤란에 대해서는 헤아려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역경과 싸워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그러한 열정이 확고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절망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1년 동안에 1만 그루가 넘는 단풍나무를 심었는데, 모두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가 되자 그는 단풍나무를 포기하고 너도밤나무를 다시 심었으며, 그리하여 떡갈나무들보다 더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보기드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너무나도 완전한 고독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의 마지만 시기에는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1933년 엘제아르 부피에는 깜짝 놀란 산림관리인의 방문을 받았다. 이 관리는 '천연' 숲의 성장을 위태롭게 할까 두려우니 집밖에서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령을 이 목자에게 통고했다. 그 관리는 순진하게도 숲이 스스로 혼자 커가는 것은 생전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 시기에 엘제아르 부피에는 집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너도밤나무를 심으러 가곤했다. 그때 그는 이미 75세였기 때문에 매일 오고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나무심는 바로 그 장소에 오두막 돌집을 하나 지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 해에 그 집을 지었다.

  1935년에는 정부의 진짜 대표단이 '천연의 숲'을 시찰하러 왔다. 산림수자원청의 고위관리와 국회의원, 전문가들도 함께 왔다. 그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단 한 가지 유익한 일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즉 숲을 국가의 관리 아래 두고 사람들이 숯을 만들러오는 일을 금지한 것이다. 그들 역시 건강이 넘치는 젊은 나무들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숲은 국회의원에게까지도 유혹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대표단의 산림관리관들 가운데 내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숲의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어느 날 우리 두 사람은 엘제아르 부피에를 찾아갔다. 우리는 대표단이 시찰한 지점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한참 일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 산림관리관은 쓸모없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가치있는 것을 알아볼 줄 알았고 침묵할 줄도 알았다. 나는 선물로 가져간 달걀 몇 개를 내놓았다. 우리 셋은 함께 점심 식사를 했고 말없이 경치를 바라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지나온 언덕길은 6∼7미터 높이의 나무들로 뒤덮혀 있었다. 1913년에 보았던 이곳의 모습이 생각났다. 황무지가 떠올랐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의 평화가 이 노인에게 거의 장엄하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주었다. 그는 하느님의 운동선수였다. 나는 그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떠나기 전에 내 친구는 이곳의 토양에 알맞을 것 같은 몇몇 나무 종류에 관해 간단하고 짧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내 친구는 나중에 "그는 그런 것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한 시간쯤 걸은 뒤에 생각이 떠오른 듯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무에 대해 그 어느 누구보다 훨씬 많이 알아. 그는 행복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발견한 사람이야."라고. 이 산림관리관 덕분에 숲만이 아니라 엘제아르 부피에의 행복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내 친구는 숲을 보호하기 위해 세 명의 산림관리관을 임명했고 이들에게 몹시 겁을 주어서 나무꾼들이 아무리 뇌물을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작품이 심각한 위험을 맞았던 것은 1939년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 때였다. 그 당시에는 적지 않은 자동차들이 목탄가스로 움직였기 때문에 가스연료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무들이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1910년에 심은 떡갈나무부터 베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지역들은 모든 도로망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계획은 재정적으로 비경제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목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그 곳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평화롭게 자기 일만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는 1914년의 전쟁을 몰랐던 것처럼 1939년의 전쟁 역시 모르고 있었다.

  [추억]

  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본 것은 1945년 6월이었다. 당시 그는 87세였다. 나는 황무지로 가는 길을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전쟁이 이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뒤랑스강의 계곡과 산 사이를 오고 가는 버스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처음 산책했던 장소가 어디인지 더 이상 알아 볼 수 없었는데, 그것은 비교적 빠르게 움직이는 교통수단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버스가 가는 길은 나를 처음 보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옛날의 그 황량했던 폐허의 땅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을 이름을 떠올려야만 했다. 나는 베르공 마을에서 버스를 내렸다.

  1913년에는 열 채 내지 열두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에서 단 세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야만스러웠고 서로 미워했으며 덫으로 동물을 잡아서 먹고 살았다. 거의 선사시대 원시인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가까운 삶이었다. 쐐기풀이 버려진 집들의 주위를 덮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조건은 전혀 희망이 없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물며 덕을 추구하며 살아갈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공기까지도. 옛날에 나를 맞아주었던 건조하고 난폭한 바람 대신에 향긋한 냄새를 실은 부드러운 미풍이 불고 있었다.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것이 저 높은 언덕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 소리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못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진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샘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은 풍부하게 넘쳐흘렀다. 그리고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그 샘 곁에 이미 네 살의 나이를 먹었음직한 보리수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 나무는 벌써 무성하게 자라 있어 의문의 여지없이 부활의 한 상징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욱이 베르공 마을에는 사람들이 노동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사람은 희망을 가져야만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희망이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허물어진 집들을 치우는 한편, 무너진 벽들을 모두 부수고 다섯 채의 집을 다시 지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의 수는 28명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네 쌍의 젊은 부부도 있었다. 산뜻하게 벽을 바른 새 집들 주위를 채소밭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채소밭에는 이것저것 섞여 있었지만 가지런히 심은 야채, 꽃, 배추, 장미꽃나무, 부추, 금어초, 샐러리, 아네모네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부터 나는 길을 걸어서 갔다. 우리들이 이제 막 빠져 나온 전쟁은 아직 삶의 완전한 개화(開花)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변화는 일어나 있었다. 낮으막한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라고 있었고 좁은 계곡 바닥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 전체가 건강과 번영으로 다시 빛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르는 것만으로 족했다. 내가 1913년에 보았던 폐허의 자리에 지금은 잘 단장된 아담하고 깨끗한 농장들이 들어서 있어서 행복하고 안락한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옛날의 그 샘들은 숲이 머금고 있었던 비와 눈에서 물을 받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 샘물로 물길을 만들었다. 단풍나무 숲 속에 있는 농장마다 샘물이 흘러들어 융단같은 박하잎 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을은 조금씩 재건되었다. 땅값이 비싼 평야지대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 젊음과 활력과 모험정신을 가져다 주었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소리내어 웃을 줄 알며 시골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맛을 즐길 줄 아는 소년 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된 뒤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습이 변한 옛 주민들, 그리고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수가 1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누리는 행복의 빚을 엘제아르 부피에에게 지고 있었다.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힘만을 갖춘 한 사람이 홀로 황무지에서 이런 풍요한 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이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리고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위대한 영혼 속의 끈질김과 고결한 인격 속의 열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신에게나 어울릴 이런 일을 훌륭하게 이루어낼 줄 알았던 그 소박한 늙은 농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품게 된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1947년 바농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