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애인의 날이였습니다.
좋은 기사가 있기에 퍼와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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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건양의대 김안과병원(원장 김성주)과 사단법인 전국저시력인연합회(회장 미영순)가 제26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실시한 `마음으로 보는 세상' 글 공모 시상식이 19일 오후 병원 강당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시각장애인 부문과 시각장애인의 가족, 친지, 친구 등 비장애인 부문으로 나눠 진행됐는데 장애인 32편, 비장애인 24편 등 총 56편의 수기가 응모됐다.
응모작에 대해서는 `우담바라', `욕심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등을 쓴 소설가 남지심씨가 심사위원을 맡아 수상작을 결정했다.
병원측은 수상자는 일반, 장애인부문 모두 대상, 우수상, 가작 각 1명을 선정키로 했으나 장애인 부문은 글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가작을 2명 뽑았다.
특히 이번에 비장애인부문 대상을 받은 조은경(22)씨는 시각.청각 1급 장애인인 언니의 사연을 소개했는데 수상 통보과정에서 본인도 2급 청각장애인으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한다.
김안과병원의 협조를 받아 조씨의 수기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시각장애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청각 1급 장애인이다.
언니의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원인을 모른 채로 두꺼운 안경을 쓰고 살아왔던 언니였지만 또래에 비해 공부도 잘했고 성격도 활발한 언니였다.
세 살 터울로, 바쁜 어머니 대신 늘 나를 돌봐주었던 언니였기에 나는 그런 언니가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런 언니에게 불행이 닥쳐온 건 언니가 고등학생 일 당시였다. 언제부터인가 언니는, 시력 뿐만이 아닌 청력마저도 잃어가기 시작했고 길을 걸을 때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많은 병원을 전전했지만 모두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진단 내리던 중 보건소의 소개로 찾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의 병명은 뇌종양이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진행된 뇌종양. 다행히 비악성이었지만, 수술은 위험했고 만일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언니는 평생을 누워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3개월 이상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마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어 버린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사형선고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못 이겨 헤어지신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채우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오며,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려 마음 아픈, 나의 사랑하는 언니의 삶에 대한 보답은 너무나 터무니없었다.
가난도, 불행도, 세상이 주는 차별과 냉대에도, 그 어떤 서글픔도, 무엇도 감히 헤치지 못했던 언니의 죽음이, 바로 코앞에 와 있었다.
진찰을 하셨던 교수님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며 안타까워 하셨고 어머니와 나는 진료실을 나와, 세상과 동떨어진 듯한 외로움과 설움에, 한참을 울어야 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수술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어머니와 나였지만 언니의 결심을 확고했다.
어떤 결과에도 침묵할 테니 꼭 수술을 받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머리를 깎고 이른 새벽 수술실로 들어간 언니는 정확히 24시간 후에야 수술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마치 거짓말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생에서 가장 긴 하루이기도 했다.
피가 다 빠져나가 하얗게 질린 채로 중환자실로 옮겨지던 언니를 보며 나는 끝내 펑펑 울고야 말았다.
며칠 후 면회시간이 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갔을 때 언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사랑해"라고.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은경아, 사랑해"라고.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시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매 순간순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도 너무도 눈물겨울 수 없었다.
오랜 입원기간을 끝내고, 언니는 무사히 퇴원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사랑하는 언니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청력은 완전히 잃었고, 시력은 희미한 빛만 남아있었다.
사람의 얼굴과 몸을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빛이었다.
게다가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어 거동조차도 힘겨웠다. 분명 새로운 삶을 선물 받은 언니였지만, 언니는 예전과는 달리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그렇게도 외출을 좋아하고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던 언니였지만 외출도 꺼려했고, 집으로 손님이 오는 날은 방으로 숨어버렸다. 가끔 휠체어를 타고 외출을 하면,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에 받은 상처가 너무 큰 것 같았다.
비장애인들은 그걸 몰랐다.
별생각 없이 쳐다보는 눈빛이 누군가에게는 칼이 되어 꽂힐 수 있고 가벼운 손가락질에 어떤 사람은 크게, 크게 울며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걸 어떤 날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방바닥에 가위와 머리카락이 너부러져 있고 어머니와 언니가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언니가 머리카락을 마구 자르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울부짖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다리가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날은 뇌수술 후에 먹고 있던 항경련제를 과다복용해서 응급실로 실려간 일도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언니는 수면제를 사러 나갈 수가 없었기에, 먹고 있던 항경련제를 과다하게 복용한 것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찾은 목숨을 스스로 포기하고 싶을 만큼 세상은 언니에게 가혹했던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그렇게 슬프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언니가 스스로 이겨내고 지켜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언니가 다시 변하기 시작한 건, 평소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 들어오신 어머니의 모습을 본 이후였다. 그래도 어떡하겠느냐고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사는 날까지는 살아보자는 어머니의 말씀을 언니의 손바닥에 적어내며,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빌며 한참을 울어야 했던 그날 이후로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 외출하러 가자는 말도 먼저 했고, 집으로 손님이 와도 자리를 지켰다. 자주 공중목욕탕에 다니고 싶어했고, 사람들의 시선 따위도 의식하지 않았다. 거동은 여전히 힘겨웠지만 집안 청소도 했고, 삐뚤삐뚤한 글씨지만 가끔은 글을 써내려 가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벌써 6년도 더 넘어가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는 요즘도 너무나 부지런하다.
방청소를 비롯 설거지도 하고 엉성하긴 하지만 최고로 맛있는 요리도 한다.
한번도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해 가끔은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이 보여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내가 받았던 나의 사랑하는 언니의 그 큰 사랑에 보답할 기회를 하늘에서 주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건, 그렇게 변하기 위해 애쓴 언니의 노력이 세상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도 언니와 함께 외출을 하면 사람들은 언니를 쳐다보며, 수근거리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던 나의 감정도, 이제는 안타까움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운 세상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그게 진짜 아름다운 거였다.
왜냐하면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처럼 보호 받고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얗고 눈부신 세상은 다가오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언니를 위한 눈빛(雪色)나는 세상을 오늘도 나는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