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연스럽게 노래의 날개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하세요♡ - 대지의 천사 -

이 증언 내용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삭제하지못하고 저장해 두었가다 이렇게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여러님들!
사랑의 에너지와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때입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임신 8개월이나 9개월이 되었어도 태아를 죽이기 위해 커다란 주사기로 임산부의 자궁에 소금물을 집어 넣었습니다. (운다).


  본문 내용중..


20만명중


유일한 1명의 생존자 : 이순옥


북한 죄수캠프에서의 7년간의 고문

이순옥은 북한의 개천교도소의 죄수였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체험을 발간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겪은 일을 증언했다.

또한 미NBC뉴스에게 자신의 개천에서의 시간들을 말했다.

저는 평안북도 개천에 있는 정치범교화소에 7년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부터 1993년 1월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투옥시 제 나이는 39이었습니다.

저는 중앙 물자보급소에서 일했으며, 저는 그 곳에서 관리자였으며, 북한에서 우리는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들을 배급했습니다.

북한경제가 침체되고 물자배급 상황이 나쁘다는 이유로 저는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는 6,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전부 정치범이었고 그들은 꼭 짐승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너희들은 짐승들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모든 죄수들이 사상적으로 반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식량부족때문에 비참하게 되었고, 한마디 불평을 중얼거렸을 때에 그들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7,000명의 죄수들 중 2,000명은 집에 아이들이 있는 주부들이었으며, 죄수생활한 지 한 달만에 그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5살, 7살의 아이들을 둔 젊은 주부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교도소에 끌려 왔을 때 “나는 아이들이 있고 남편도 교도소에 있는데 이제 내 아이들은 집에서 굶주릴 것이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6,000명의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가 처형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여성이라고 달리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독재정권 아래에서, 저는 쇠기둥에 가슴, 배, 다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총알 3발씩을 가지고 있는 6명의 사형집행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부 18발의 총알을 심장에 쏠 것입니다. 비인간적입니다.

저는 너무나 슬펐고, 우리가 전쟁범죄자들도 아니고, 적도 아닌데, 아이들의 어머니인 젊은 여자를 그렇게 처형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교도소에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이후로 제1의 적은 하느님입니다.

김일성은 하느님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1956년과 1963년 사이에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별도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서 저는 하느님을 믿게 되어서, 저는 간수들에게 걷어 차이고, 철공소에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고열 속에서 해야 하기에 제 등골이 오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키는 120-130센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제 등은 축구공처럼 휘게 되었고, 제 심장과 위장사이의 간격이 좁아졌습니다.

제 어깨와 뼈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는 기이한 동물처럼 보였습니다.

제 어깨 뼈가 너무나 튀어 나와서 저는 머리가 두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로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노예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10센티 넓이, 1.5미터 길이의 가죽혁대로 맞았습니다.

군화발에 차였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긴 동물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교도소생활동안 이 잔악함을 겪었으며, 7년동안 매 끼니로 100그람의 강냉이만 받았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다른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강냉이과자는 쵸코파이의 크기인 100그람짜리입니다. 그리고 소금물 작은1컵을 주었습니다.

일일 정량을 다 먹지 않는 사람은 50그람으로 줄였습니다.

저는 단지 독재치하의 죄수였습니다. 이러한 독재치하에서는, 우리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눈물을 보일 수도 없고,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도 없으며, 우리는 하루에 3번만 화장실에 가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저는 총칼의 압박아래서 제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그런 엄격한 통제 밑에서 살아 남은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개천교도소의 6,000명의 죄수들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으며, 그들은 정치범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말 한마디를 중얼거렸습니다.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지도자인 김정일이 있다면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이런 불평 한마디가 우리를 교도소로 집어 넣습니다. 저는 공개처형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상의 인간지옥입니다.

그리고 저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적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로 동물이 아닌 인간을 상대로 실험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의 지시였습니다. 그들은 동물 대신에 죄수들에게 테스트했습니다. 저는 불쌍한 희생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실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에 투옥되었으며, 1988년부터 석방된 1993년까지 사이에 저는 실험감독관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기대 이상으로 생화학무기의 효과가 나온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들은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저는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제 얼굴이 이렇게 쪼그라든 것이 저는 정말로 슬픕니다.

제 얼굴은 쪼그라들었고, 제가 할 일을 안했다는 이유로 저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 얼굴의 왼쪽은 이렇게 기형이 되었으며 본모습으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교도소에는 6,000명의 죄수들이 있었고, 북한에는 전부 20만명의 정치범들이 있습니다. (울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정권치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북한에 이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이쪽 편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자기의 좋아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옷과 먹을 것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북한에서의 죄수생활을 회상할 때엔 그 곳에는 2,000명이 넘는 주부들과 임산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치범들은 3대를 멸하는 법이 있습니다.

세대를 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낙태시키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임신 8개월이나 9개월이 되었어도 태아를 죽이기 위해 커다란 주사기로 임산부의 자궁에 소금물을 집어 넣었습니다. (운다).

그리고 가끔 산 아이가 태어나면 간수들이 핏덩이의 아이를 발로 차서 죽입니다. (운다).

그리고 저는 갓난 아이가 고통으로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운다).

저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지옥을 목격한 것을 이렇게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운다).

저는 86년 10월에 붙잡혔으며, 87년과 88년 5월에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잊을 수 없읍니다.

간수들은 군화발로 저를 찼으며, 해보지도 못했던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한번 그들이 우리들 중 50명을 뽑아서 강당에 넣고 그들에게 삶은 배추 조각을 주었고, 그들이 그것을 먹자마자, 그들의 입과 항문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그들이 이렇게20분 내지 30분만에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저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게 생시입니까 악몽입니까.

그 때 저는 비명을 질렀고 강당 밖으로 쫒겨 났습니다. 그것은 생화학실험이었으며, 10,000분의 1이라는 지극히 소량만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건강한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1990년, 91년, 92년에 걸쳐 그들은 기독교신자들을 더욱 가혹히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별도의 작업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때, 30명의 죄수들이 간수들의 군화발에 차여 죽었습니다. 2명의 간수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주님.”하고 주님을 찾아 울 때, 그들은 끓는 물을 그들에게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잿더미로 되었습니다. 북한같은 지옥은 또다시 없습니다.

우리는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가장 열악한 상태인 3등급 영양실조에 달하면, 물이나 빵을 먹으면 곧바로 항문을 통해 배출되어 버립니다.

교도소에는 쥐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가죽제품들을 만들기에 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쥐를 붙잡으면 그 날은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쥐를 잡는 것이 발각되면 우리는 별도의 독방에 쳐 넣어집니다. 쥐를 잡으면 우리는 요리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먹었습니다. 우리가 한조각의 빵과 소금기 있는 물을 마시고 이렇게 1년을 지내면, 인간은 짜든 날것이든 무엇이든지 그 맛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쥐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맛 없이. 저는 머리를 발로 걷어 차여서 종종 두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시력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 어께는 휘어 있습니다. 어깨 양쪽이 똑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고문도 당했습니다.

저는 물 속에서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드러 누어서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 때 제 위장이 물로 가득찼을 때 그들은 제 위장을 밟아서 물높이와 제 몸 높이를 같게 하고, 물이 제 입과 항문으로 쏟아져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높이와 제 몸 높이가 같아질 때까지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제 갈비뼈와 등뼈 그리고 제 다리는 정상상태가 아닙니다. 북한에서의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부작용은 아직까지도 굉장합니다.

저는 남한에서 위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물고문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고문을 할 때 그들은 특별히 고안된 10리터짜리 주전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죄수들의 입에 주전자꼭지를 넣으면 목구멍이 자동으로 열렸습니다. 그 때 제 얼굴에 이렇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여기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천장에 두 손과 함께 매달고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매달렸을 때 제 몸의 무게때문에 수갑을 찼기에 손목에 부상을 입고 살점이 떨어졌습니다.

제 어깨 오른쪽은 덩어리채 튀어나왔고, 뼈가 위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이 쪽은 그들이 짓밟았기에 움푹파였습니다.

그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사무실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제 책임이 아니고 지도자 (김정일)의 책임이었는데도 그들은 주민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것이 제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로부터 제 책임이라는 시인을 받기 위해 저를 고문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고문할 동안, 어쩔 때엔 이틀씩, 저는 의식을 잃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등에 상처가 난 것을 보았고, 커다란 파리들, 어쩔 때엔 구더기들이 피묻은 부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내 사랑하는 남편이 나의 투옥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강제노역소로 가야만 했던 것 때문에 제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오직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그 때 제 유일한 아들은 김일성대학 대학생이었고, 제 남편은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강제노역소에서 노동을 해야했으며, 저는 아직도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것과 제 남편이 그러한 상황에서 죽은 것 때문에 마음이 안 좋습니다. 제 아버지는 북한에서 고위직이었고, 제 자신도 대학을 나왔으며 노동당 당원이었고, 그 전에는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심한 고통을 참을 정도로 제가 강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그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 분명 기적입니다. 지금은 완전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로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마치 제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낍니다. 당장은 2,300만 북한주민들이 해방될 수 있는 날이 더 가까워진다고 희망합니다.

저는 북한으로부터 신체적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비인간적인 자입니다. 저는 그러한 잔혹함을 겪었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으며, 그래서 김정일은 수백번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생명이 희생되어도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내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의 이유입니다. 저는 세상사람들 모두가 북한에서의 그러한 잔혹함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없는 곳--- 오직 북한에서만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그곳에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가족교도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었던 곳 같은데서 살아 남은 사람은 제가 유일합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미국 의회와 미국 정부, 그리고 UN에서 알아야 하며, 그들은 김정일이 죄수들을 해방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북한주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저는 이것을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 24개의 교도소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와, 제 아들, 그리고 강철반, 안혈, 안영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UN을 포함한 세상에 알렸으며, 저는 김정일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교도소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수들의 숫자 20만여명,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죄수들 20만 --- 전체 40만명의 죄수들이 교도소에 있습니다. 지금은 몇명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으며 몇명이나 죽음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북한은 매년 죄수의 숫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죄수들이 만드는 제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북한사람들, 3살짜리 아이들도 죄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아이가 울다가도 교도소에 보낸다고 하면 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잘못 말하면 언제 붙잡혀 교도소로 보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의견을 표현하는데에 매우 조심합니다.

저는 고문때문에 제 눈 왼쪽에 상처자국이 있고 제 이빨들은 부러졌습니다.

제 얼굴 왼쪽은 마비되었습니다.

그들이 제 몸을 너무나도 심하게 짓밟아 제 이빨이 부러졌고 제 눈알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알을 다시 집어 넣고 손으로 며칠동안 주물렀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풀러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파인 곳을 보십시오. 제가 의식을 차린 후에 발견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로 찔림을 당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원문:

I WAS imprisoned for seven years at the political brainwashing camp Kaechon in Pyungbuk province.… I was in prison from 1987 till January 1993. I was imprisoned at the age of 39.
I worked at the chief product supply office, I was the general manager of the product supply office, in North Korea we were supplying food and materials to people. And I was imprisoned because the North Korean economy was in recession and the supply of materials was not in good condition, that’s why I was imprisoned.
In Kaechon Prison, there were more than 6,000 prisoners. All of them were political prisoners, and they were treated just like beasts.
And the guards of the prison told the prisoners, “You are not human beings. You must think that you are beasts; otherwise you will not survive.”
Not all the prisoners were ideologically against the government ? they were just miserable because of the lack of food, and when they uttered one word of complaint, they were considered to have a problem ideologically.
Among 7,000 prisoners there were about 2,000 housewives who had children at home, and after one month of my life in prison, I saw them publicly executed.
I was crying out, calling my children’s name. And I saw one young housewife who had children age 5 and 7. I saw she was forced to come to the prison, and she shouted “I have children but I’ve been imprisoned, and my husband was imprisoned, and now the children will starve at home.” And I saw her executed, in public, in front of 6,000 prisoners.

When I was in prison I was treated with no regard to my motherhood. Under the regime of Kim Jong Il’s dictatorship. I was fastened to an iron pole, fastened at my bosom and stomach and legs.
There were six executioners with three bullets each. They would shoot a total of 18 shots to the heart. That is inhuman. I was so sad, and I was so stunned to see that young woman executed although we are not war prisoners and we are not enemies, but they executed a mother of children, just like that.
In the prison there were many Christians. And since the Korean War ? in Korea they call it June 25 War ? the No. 1 enemy is God. Kim II Sung hated God most.
Between 1956 and ’63 many Christians were imprisoned, and the rest of their families were imprisoned in another separate prison for families.
In the Kaechon Prison, I believed in God, and I was kicked by the guards, and I had to work in the ironworks factory.
That type of work is done under a high temperature, and my spine started to shrink. And my height became 120-130 centimeters. And I was treated just like an animal. My back became curved like a soccer ball, and the distance between my heart and stomach narrowed, and my shoulders, the bones stuck out. And I looked like a strange animal.

var nkorea=new flashObj2("nkorea"); nkorea.flashFile = "/modules/nkoreanukes/default.swf"; nkorea.altImg = "/modules/nkoreanukes/nk_nuclear.jpg"; nkorea.width = "360"; nkorea.height = "410"; nkorea.ID = "nkorea"; nkorea.downloadLink = "top"; nkorea.webTV = "false"; nkorea.play = "false"; nkorea.loop = "false"; nkorea.quality = "best"; nkorea.scale = "noborder"; nkorea.flashVer="6"; document.write(writeFlashComponent2(nkorea)); document.getElementById('nkorea').nm_bOk=true;
I felt like I had two heads because my shoulder bone protruded so much. I felt I had become an alien, not a human being in this world. I was just like a beast. I was treated just like an animal, just like a slave.
I was beaten with a leather strap 10 centimeters wide and 1.5 meters long. And I was kicked with boots. And I became just like a strange animal in shape.
I experienced this atrocity during my prisoner’s life, for seven years I got only 100 grams of corn for every meal. I had no other food. Not even once. The corn cake, 100 grams, that is the size of one choco-pie. And they gave me one small cup of saltwater. If someone does not fulfill his daily duty, then the portion will be only half ? 50 grams.
I was merely a prisoner under the dictatorship. Under this dictatorship we cannot say anything and we cannot smile, and we cannot show tears, we cannot walk freely, and we were forced to go to the toilet only three times a day.
I cannot believe I could survive under such tight control, even controlling my physical functions and under the pressure of rifles and knives.
During my stay in Kaechon Prison most of the 6,000 prisoners were struggling to survive, and they were not political prisoners. They uttered a word, like this: “Why do we have to starve? If Kim Jong Il, the leader, is there, why do we have to starve?” Such a complaining word made us get put in prison.
I witnessed public executions. I felt that this is not a country to live in; it is a human being’s hell on earth.  

And I was really shocked when Kim II Sung was alive, he tried to manufacture biochemical weapons and testing not on animals but with human beings because our enemy is not an animal, but a human being.
This was Kim Jong Il’s instruction. And they tested them on the prisoners instead of animals. I saw so many poor victims. Hundreds of people became victims of biochemical testing.
I was imprisoned in 1987, and during the years of 1988 through ’93, when I was released, I saw the research supervisors ? they were enjoying the effect of biochemical weapons, effective beyond their expectations ? they were saying they were successful.
Recalling that scene, I still cannot rid myself of nightmares. You can see my face shrank like this, and I’m really so sad. My face shrank, and I was tortured on account of what I have not done. And the left side of my face is like this.… The left side of my face is deformed like this and cannot recover.
In this prison there were 6,000 prisoners, and there are a total of 200,000 political prisoners in North Korea (starts to cry). How can there can be so many political prisoners under a regime where we cannot express our own thoughts? So it is nonsense. It is nonsense to have so many political prisoners. So I would appreciate it if you understand that there are so many political prisoners in North Korea. Living on this side, I see many people are happy and free and free to take care of their children as they like, give them clothes and food

In the meantime when I recall my prisoner’s life in the north, there were over 2,000 housewives and pregnant women. And there is a law for the political prisoners not to continue generations, for three generations. To stop the generations. So they were forced to abort their children. They put salty water into the pregnant women’s womb with a large syringe, in order to kill the baby, even when the woman was eight months or nine months pregnant (crying). And then, from time to time there a living infant is delivered, and then if someone delivers a live infant, then the guards kick the bloody baby and kill it (crying). And I saw an infant who was crying with pain (crying).
I have to express this in words that I witnessed such an inhumane hell (crying). I was captured in October ’86, and I was imprisoned in ’87 and in May 1988. I cannot forget about this. The guards kicked me with their boots, and I was forced to do work that I never had done before.
Once they picked out 50 persons from our group, and they put them in the auditorium and gave them a piece of boiled Korean cabbage, and then as soon as they ate it, blood came out from their mouth and anus. And they died. I saw that in 20 or 30 minutes they died like this in that place.
Looking at that scene, I lost my mind. Was this reality or a nightmare? And then I screamed and was sent out of the auditorium. It was biochemical testing, using just a bit, the substance just 1/10,000. I cannot forget that image. I wonder how a human being can kill another healthy human being like that.
During 1990, ’91, ’92, they treated the Christians more strictly. They were moved to a separate working place. At that time, 30 prisoners were kicked to death by the guards’ boots. Two guards did it. And when they cried to the Lord, “My Lord, my Lord,” then those people had boiling water poured on them. And they became carbons. There is no other hell like North Korea.
We experienced malnutrition, and when we reached the third degree of malnutrition, the worst condition, when we drank water or ate bread, it came out through the anus immediately.
In the prison there were rats, they are manufacturing leather goods and leatherwear, so there are many rats. When we could catch rats, we thought it was a fortunate day.
If we were found catching rats, we were put in a separate solitary cell. When we caught a rat, we didn’t cook it. We just ate it.
When we eat one piece of bread and cup of salty water and pass one year like this, the human loses the sense of taste, whether it is salty or fishy or whatever. So we can … could eat live rats. Without having any taste.
I have headaches from time to time because I was kicked in the head. And my eyesight still hasn’t recovered. And my shoulder is curved. Both sides of shoulders are not even.
And I was tortured with water. And I was in water, and I had to drink water. I had to lie down and drink water, then when my stomach was full of water they stamped down on my stomach making the water level and my body level even and then the water came out of my mouth and anus. And they tramped until the water level and my body level was even.
And my breastbone, backbone and my legs are not in normal condition. Physical side effects after the torture in North Korea was too much until now. In the south I could get a stomach operation but still I am suffering from pains, because of the water torture.
When they do the water torture, they use a specially designed 10-liter kettle. They put the mouth of the kettle into the prisoner’s mouth, then automatically the throat is opened. At that time I had a scar here on my face, by that tenure. Still you can see a bit here. And they hung me from the ceiling, two hands together and then beat me. Because of the heavy weight of my body, when I was hung, I have a wound on my wrists and the flesh removed, because of the handcuffs
The left side of my shoulder protrudes in a lump, the bone protrudes upward. And this side is hollowed because they tramped on me here.
He most painful moment for me at the time was the torture. I was captured by them in my office, without knowing the reason. They told me I was responsible for the non-supply of food to the people, although it was not my responsibility but the responsibility of the leader.
And they tortured me in order to get a “yes” from me, that it is my responsibility. While they were torturing me, sometimes for a couple of days, I lost consciousness, and when I came to, I saw I had a wound on my back and the large flies defecated on the bloody part and then sometimes maggots.
My heart was breaking because my only son and my beloved husband, they have no relationship to my imprisonment, but they had to go to a forced labor camp. And this type of system exists only in North Korea, nowhere else in the world.
At the time my only child was a university student, at Kim Il Sung University. And my husband was a school principal. And they had to work in the forced labor camp, and still I feel very bad because I was born in North Korea, and my husband passed away under such circumstances.
My father was in a high-ranking position in North Korea, and myself I was graduate of the university, and I was a member of the labor party, and I didn’t suffer from anything before. That’s why I was not strong enough to have patience to experience severe pain. So in the prison I had to experience such pain, and it is just a miracle that I was freed from such circumstances.
Now it has changed, totally changed 180 degrees. Right now I feel that I don’t have to worry. I feel like I died and was reborn.
Right now I hope the day comes sooner when the 23 million North Koreans can be set free. I feel a physical threat from North Korea.
Kim Jong Il is an inhuman person. And I experience such atrocities, and I make it public, so Kim Jong Il may wish to kill me hundreds of times. Therefore I feel threatened. At the cost of my life I don’t worry. That’s why I have such courage.
I think the rest of the world’s people should know about such atrocities in North Korea. Where there are no human rights ? this exists only in North Korea.
So far almost no one has survived of those who were imprisoned there. There were a couple of them who survived from the family prison. But in the prison like mine, I’m the only person who survived. It is a secret.
And the facts should be known by the United States Congress and the government, and the United Nations, they should make Kim Jong Il set the prisoners free. By all the people’s voice as one, I sincerely request this.
When I was there, there were 24 prison camps. After that, myself, my son and Kang Chol Van and Ahn Hyol and Ahn Nyung Chol and some other people made the facts known to the public, including the U.N., and I think Kim Jong Il took it seriously, and now the number is reduced to half. However, the number of prisoners are 200,000-plus, and other types of prisons 200,000 ? total 400,000 prisoners are in the prisons.
Now I don’t know how many persons are put into the prisons and how many prisoners are killed at this moment. But North Korea, they have a plan to put people into prison, the schedule the number of prisoners every year. That is not because they are guilty but because they need the manufacture of products by the prisoners.
All the North Koreans know there are prisons, and even 3-year-old kids know there are prisons, and when they cry, if they are told, “You will be sent to a prison camp,” then they stop crying.
They are always very cautious to express their opinion, even one word because they don’t know when they will be captured and imprisoned if they say the wrong thing.
I have a scar on the left corner of my eye because of the torture, and my teeth were broken. This left side of my face is paralyzed.
They tramped on me so strongly that my teeth were broken and my eyeball came out. And I put it back in the socket again and massaged it by hand for a couple of days. And it was swollen. And see this dent ? I find it after recovering consciousness so I don’t know what happened, but I must have been poked or stabbed with some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