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탈북자동지회 - 월간 <탈북자들> 2003년 7월호>>


북한 정권의 핵 문제만이 국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지금 중국에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은 체포의 위협속에 숨을 죽이며 피말리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2003년 4월부터 6월까지 탈북자들을 만나고 온 정일영씨와의 만남을 통해 최근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실태를 알아보았다.


1.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

내가 중국에 처음 간 것이 4월 10일이다.
무순, 장춘, 심양, 연길 등을 다녔는데 요녕성 무순 월두방(월두촌)에 탈북자 여성들이 있는 매춘동네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 보았다.
처음 들어 갈 때는 탈출시킬 목적으로 매춘동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일반 외국인들은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과 동행했다.
여자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70분을 즐길수 있단다.
시간이 초과되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포주의 설명 이였다.
비용은 1명당 한화로 8만원(중국돈 500위안 정도)이었다.
안내 받은 방의 크기는 1,5평이 채 안 됐고 화장품 대와 거울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충격을 받았다.
여자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자는 벌거벗은 채 누어있는 형편 이였다.
이북 사투리가 나오자 여자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놀라면서도 습관처럼 자리에 누웠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일어나라고 했다.
내가 들어온 이유를 설명하고 약 40만원(한화)정도 되는 돈을 주면서 탈출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탈출"을 거부하면서 이런 부탁을 했다.

"경찰한테 알리지 마라. 그래도 이 생활이 북한에 끌려가서 죽는 것 보단 낫다."

본인이 그렇게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은 시간동안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단다. 9개월이나 되었는데도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 얼굴은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9개월 동안 옷을 입어본 적도 없다는 여인 이였다. 하루에 받는 손님이 평균 15명이고 많을 때는 20명까지 받는단다. 운영하는 사람은 한족이고 주 고객들은 중국사람들로 사장이나 회사 간부들이 많다고 했다. 주말쯤 모여들어서 짐승처럼 놀다간다고 했다. 여자는 함경북도 김책시가 고향이라고 했는데 막 국경을 넘어올 때 중국교포에게 납치를 당해서 끌려 온 것이 여기라고 했다. 돈? 먹여주고 살려주면 되는것이지 무슨 돈을 더 받는가고 되묻는다. 손님이 주는 팁도 가질수 없단다.아무리 벌어도 소유권이 없으니까 돈을 줘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다닐 수 있는 곳은 화장실(목욕시설이 있다고 함) 정도이고 그 범위가 약 10미터 정도다. 그것도 벌거벗은 채로. 그러니까 9개월 동안 제일 멀리 가본 것이 10미터 정도다.

가기 전에 어떻게든 탈출시키려고 연구를 해봤는데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때 생각한 건 너무도 우리민족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종군위안부들은 그래도 옷이라도 입고 있었다는데 지금 탈북 여성들은 그런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렇게 비참한 탈북자들 문제를 방관하고 있고 국내의 많은 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먼 곳에 있는 나라보다 당장 가까이 에서 고통받고 있는 같은 민족을 도와줘야지...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팔려 다니면 인생을 망치는 법인데 어떻게 도울 수가 없어 가슴이 찢어진다.


2. 지린(吉林)성 이도백화

5월9일에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 연변 이도백화의 산골에 들어가서 시체 2구를 봤다.
옷을 보니 이북 옷이었고 신발도 신의주 신발이었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까마귀들도 많이 모여있었고 벌레가 아주 많았다.
그 시체를 보고 나서 며칠동안 밥도 못 먹었다.
저렇게 장백산 주변에서 죽어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현지의 조선족들은 파악 할 수도 없다고 했다.


3. 지린(吉林)성 연길, 화룡, 용정

여자들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슴 아픈 것이 꽃제비들이다.
6월 초순에 연길에서 사스 때문에 움직이기가 곤란했는데 연길 시내와 화룡과 용정에서 꽃제비들을 보았다.
그들은 대여섯 명씩 패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애들 옷은 더럽다는 말로도 표현 못하겠고 머리에는 서캐가 하얗게 내려 있었다.

거기서 화가 나고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경찰이나 신고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지키고 있다가 한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이 돈을 줄 때 붙잡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들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돈을 뜯으려고 혈안이 돼있었다.
나도 아이들을 도와주다가 붙잡혔는데 8시간만에 풀려 나왔다.



4.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산둥성 청도에서 7명의 일가족을 만났다.
북한을 탈출한지 5개월 째라고 하는데 아버지, 형, 형수, 형네애들, 그리고 나와 연락했던 사람과 그 부인 이렇게 7명이었다.
그들은 지금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먹는 것과 자는 것만 해결할 뿐 월급은 못 받는다고 했다.
그 공장 사장한테 물어보니 이들이 아주 성실하게 일을 잘한다고 했다.
자기도 위험을 감수하고 보호해준다는 말에 월급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남한 사람들...이왕 도와 줄 거면 좀더 양심적으로 도와주면 좋겠다.


5. 다시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

요녕성 무순 열툰이라는 데를 가게되면 반정신이 나간 노부부가 살고 있다.
2년 전 장백현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때 22살난 딸을 데리고 왔는데 두만강을 건너와서 한족1명과 조선족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그들은 딸을 요구했고 응하지 않으면 세 명 다 잡아간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딸을 빼앗긴 노부부는 돈을 벌어 자식을 찾아보겠다고 힘겹게 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처지가 너무 딱해 집을 잡아주고 필요한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전화를 설치해줬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일해 생계는 유지하는데 소원은 딱 하나 죽기 전에 딸을 찾는 것이다.


이런 여린들, 이런 아이들, 이런 사람들...

...형제들아, 그들이 다름 아닌 우리의 고향 사람들이고 우리의 누이이며 아이들이 아니던가...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밥술을 떠넘기지 못한다.